만취당 후손들이 설 오후 만취당에 모여
잔을 올리고
세배를 하고 있다
만취당 후손들

400년 조상 숭배의 전통, ‘선비의 고장 영주의 자랑’
제례의 의미는 조상과 후손이라는 ‘혈통적 연결고리’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한국인에 있어 제례는 단순한 전통문화가 아니라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조상과 후손이라는 ‘혈통적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취당 후손들은 “100년 전 선조님들이 지금 우리를 걱정했지만 지금 우리들이 제례를 잘 이어 가고 있다”면서 “지금 또한 100년 후를 걱정하지만 기우(杞憂) 일 것”이라고 말했다.

만취당의 설 풍습

만취당은 이산면 신암2리 두암마을에 있다.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盖國,1548-1603) 선생 후손들은 설날 오후 사당에 모여 세배 드리는 풍속을 400여 년간 이어오고 있다.

연안김씨 좌군사정공파 종친회(회장 김사운)가 주관하는 경자년(2020) 설날 세배(茶禮) 행사에는 김사운 회장, 김원영 전 회장, 김종일 영주지역종친회장, 김석기 덕산고택 주손, 김종국 괴헌고택 주손, 김익주 구은고택 주손을 비롯한 종중 30여명이 참례했다.

김사운 회장은 “만취당 선조님을 기리는 불천위 제사와 설날 세배는 400여 년 동안 연안김문만의 전통 예법으로 자리 잡아 고고히 이어오고 있다”며 “1970년대 까지는 100여명이 참제하였으나 지금은 가까이 사는 종중 30여명이 참여한다”고 말했다.

설 차례는 단헌무축(單獻無祝) 즉 술은 한 잔만 올리고 축문을 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날 종중들은 만취당에서 의관정제한 후 오후 2시 사당(晩翠堂大廟) 마당에 취위했다.

김종억 집례의 창홀로 신을 모셔오는 참신례(參神禮), 신을 맞이하는 강신례(降神禮)에 이어 헌관(김사운 회장)이 신위 전에 잔을 올리는 헌작례(獻爵禮), 조상이 음식을 드시는 유식례(侑食禮), 술을 더 권하는 첨작례(添酌禮), 수저를 거두고 떡국 뚜껑을 덮는 철시복반(撤匙復飯), 조상이 음식을 드시고 떠나는 사신례(辭神禮), 상을 거두는 철상(撤床),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연(飮福宴) 순으로 엄숙 봉행됐다.

만취당 김개국은?

김원영 전 회장은 연안김씨 낙남(落南) 내력에 대해 “8세 구(俱) 선조님의 형 잉(仍)의 사위인 성삼문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멸문지화(1456)를 당하자 연루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 구(俱) 선조님은 소백산 깊숙한 곳에 숨어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되셨다. 이때 낙남을 결행한 분은 구(俱) 선조님의 부인이신 인천이씨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아들 세형(世衡)과 여종 하나를 데리고 소백산 남쪽 순흥 땅으로 와 이곳 두암(斗巖)에 터를 잡으니 이때가 1457년이었다. 두암에 정착한 세형(世衡,9세) 선조님의 증손이 만취당(김개국,12세) 선조님이시다”고 말했다.

김종일 지역종친회장은 “만취당 선조님께서는 1573년(선조6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셨다”며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지역민들의 추대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영주지역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 그 후 형·예·공의 3조랑(三曹郞)을 거쳐 강원도사, 충청도사, 옥천군수를 지내신 분으로 영주가 낳은 큰 선비 중 한 분”이라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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