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시조시인·본지논설위원)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세밑에 느낀 절망감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뀐 것입니다. 막연해도 가슴 설레는 ‘희망’이 차오릅니다. 이런 걸 두고 새해 효과(New year effect)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처럼 ‘작심삼일’만이라도 꾸준히 이어간다면 그만큼은 달라질 것입니다. ‘희망’은 캄캄한 밤의 등대일 수도 있고, 사막의 신기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희망’을 향해 달려간다고 말하거나 희망을 만들어간다고도 하는 것이지요.

지나간 ‘장미대선’으로 새 정부가 들어섰고, ‘희망’을 담은 적폐청산이 이뤄지는 2년 반의 과정을 보노라니 너무 성급하다는 느낌도 있지만 아직은 ‘희망’을 버리기 싫습니다. 권력이란 동물은 누가 고삐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길들여지는 것이어서 지금의 지지율이 조금만 빠지면 스스로 살 길을 찾을 테지요. 졸견으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오만의 극치인 듯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 좋은 정권을 놓친 것인지 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반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지난 정권의 주류 정당의 이모저모를 뜯어보면 알 일이지요. 그들도 ‘희망’을 말합니다. 정권교체에 성공했다고 ‘희망’한 일들을 화끈하게 서둘지만, 야당의 어깃장을 실컷 맛본 다른 정당에 박수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은 그저 속담이 아닙니다. 그래서 ‘희망’에 대해 있고, 없고를 거론하는 것은 자기 과신 때문이라고 봅니다. ‘희망’이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몇 년 전 늦가을부터 우리는 ‘이게 나라냐?’고 울부짖었습니다. 주말 밤마다 촛불을 밝히고 대통령의 탄핵과 하야를 외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희망은 없고, 누가 봐도 그렇다”고 모든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접민주주의자가 되어 갔습니다. 앞장세우면 뭔가 이루어낼 것 같아서 정권을 교체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저것 달라진 듯 해보여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소통과 협치를 강조하는 대의민주주의를 따르기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는 실망이 컸습니다.

트래킹을 할 때 어느 굽이에서 보면 길이 없을 것 같은데, 가까이 가보면 길이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희망도 이와 비슷하지요. 어느 순간, 어느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던 길이었는데, 오만하게도 길이 없다고 말해버립니다. 오만은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을 전부라고 여김으로써, 현재를 절대화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오만과 달리, ‘겸손’은 ‘희망’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만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됩니다. 겸손은 아는 것을 모른다고 거짓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깨닫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꼬장꼬장한 노인처럼 예의에 민감한 희망은, 자신이 보고 들을 것을 맹신하지 않는 겸손에게만 손을 내민다고 합니다. 목표가 아무리 분명해도 한달음에 닿을 수 없습니다. 높은 산일수록 베이스캠프가 여럿 있어야 하고, 미리 경험을 쌓은 셀퍼도 필요한 것입니다.

현 정권의 인재 등용을 보면 이제까지와 별로 다른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내 편이어서 지난 정권에서 핍박받았다는 공통점만 있으면 어떻게 이름을 얻었으며, 어떻게 재산을 모았으며, 어떻게 유지하고 관리해 왔는지 살펴보지 않았나 봅니다. 남의 흠은 들보로 잘도 보더니만 정작 자기 이마의 흠이나 발가락과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보지 못한 것이지요. ‘겸손’은 용기의 심장이 되기도 합니다. 용기의 근육에 피가 돌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데도, 포기하지 않을 때, 겸손한 용기가 타오릅니다. 그래서 전세가 기울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싸울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희망이 없다고 말하며 포기하는 것은 오만이거나,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아직 권력은 2년 넘게 살아있을 겁니다. 4월 총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여도 모든 것을 바꾸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일 수도 있고 야당의 어깃장을 계속 이끌어낸다면 너무 긴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조금 더 ‘겸손’으로 ‘희망’을 보고, 용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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