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4,전 영주문화원 이사)

순흥 읍내리, 석교리, 동호리, 사현정, 배점리, 비봉산, 송림 마을 부근, 이자산(二子山)일대는 고분(古墳)이 밀집된 곳이다.

그 중 비봉산의 어숙묘, 기미명묘(己未銘墓)는 남한에서 처음 알려진 고구려계 양식의 신라시대 벽화고분으로 옛 묘제(墓制)와 이 지역의 고구려와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소수서원 뒤 거북봉 능선 위에 10여기의 고분이 석실 일부가 드러난 채 늘려 있다. 봉우리 바로 아래에는 최근에 뚫렸다는 도굴 구멍을 통해 살펴 보면, 장축이 동서로 된 석실은 할석으로 짧은 벽을 수직으로, 긴 벽은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쌓았다. 석실 정상부의 길이는 548cm, 폭 148cm, 천정 돌은 길이가 3m내외, 폭 120cm정도의 판석 4장으로 덮여 있다.

순흥의 고분군에는 큰 규모의 호화 고분이 많다는 것이 주목되는데, 순흥지역은 고구려의 문화가 유입되는 길목으로 어떤 배경에서 건, 당시엔 상류층들이 거주하던 특수한 고장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 한다.

이미 발굴된 비봉산의 두 군데의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그 부근의 11호, 14호 고분 등 무수한 고분들이 있으며 청다리북쪽 <바느레>골짜기에도 이미 도굴된 20여기의 잘 지은 석실 고분들이 있다. 순흥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 고분이 더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 지역의 고분들은 이미 발굴된 두 군데의 벽화고분에서 보았듯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파괴되기 전에, 그 분포며, 구조 등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요구되고 있다.

수년전에 도굴된 <바느레>의 어느 한 고분에서 수십억 원 어치 유물이 쏟아졌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호화고분들이 무방비로 도굴을 당할 때 출토된 유물들이 한때는 이 지역에 흔하게 나돌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왜정시대와 해방직후 무렵에는 거의 집집마다 고려청자 사발과 대접, 접시, 항아리 등을 생활용기로 쓰고 있었다는데, 한국전쟁 이후에 그것을 알게 된 장사꾼들이 이 동네에 들어와서 새 그릇을 주고 옛 그릇을 모조리 거두어 갔다고 한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순흥에서는 진귀한 유물인 각종 석기며, 금동불상, 석탑, 대좌 등 불교유물과 도자기, 토기, 와당 등 온갖 희귀한 물건들이 알게, 모르게 수없이 외지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기부터 순흥의 고분이 도굴되기 시작하면서 무차별적으로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을 당하다 보니, 고분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무덤에 그려진 그림의 회를 긁어 가고자(고분의 회가 학질에 명약이라는 소문에 의함)많은 사람들이 고분 속을 수없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1971년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순흥고분조사에 들어갔다. 발굴조사 작업을 지휘한 진홍섭(당시 이대박물관장)박사의 <발굴조사보고서>가 상세하게 남아있다. 이미 없어져버린 유물이야 어쩔 수 없지만 당면한 과제는 남아있는 고분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또 이곳에서 도굴당한 많은 고분 가운데 중요한 고분 몇 곳만이라도 복원하여 관리하였으면 한다. 복원하는 데는 비용이 따르겠지만 만일 이대로 방치한다면, 자연적 혹은 인위적으로 어떤 피해를 당할지 알 수 없다. 당국에서는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관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여 주기를 바란다.

<參考文獻: 順興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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