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청초

얼마 전 들려온 배우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 소식은 충격이었다. 한때 우리 가슴을 설레게 했던 최고의 청춘 스타였기에 그녀의 소식은 더욱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윤정희, 그녀가 누구인가? 해방되기 한 해 전 부산에서 태어난 그녀는 스물세 살(1967년)에 무려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대중들 앞에 나타났다. 그 후 『장군의 수염(1968)』, 『독짓는 늙은이(1969)』, 『분례기(1971)』, 『무녀도(1972)』등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우리 영화 최고의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중 돌연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을 발표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 역할이 그녀에게는 더 좋았던 것일까,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지만 우리에게 ‘영화배우 윤정희’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릴케가 말했다. 인생을 다 살아 보고나서야 비로소 서너 줄의 진정한 시를 쓸 수 있을 거라고. 1910년, 대중들에게 잊혀져가던 그녀가 릴케의 그 말을 입증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에서 당시 그녀의 실제 나이와 같은 66세의 주인공 ‘미자’의 역할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윤정희는 그녀가 최고의 배우임을 우리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미자가 치매 초기증상을 보이는 역할이어서, 그리고 실제의 윤정희가 그 무렵부터 가벼운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더 가슴이 아프다.

그 영화는 남편도 없이 허름한 도시 변두리의 아파트에서 이혼한 딸이 맡긴 외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예순여섯 살의 쓸쓸한 신세의 여자, 미자의 행적을 시종일관 화가 날 정도의 잔잔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그 영화를 보고 처음 내 머리 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헐거운 감성의 여자가 살아내야 했던 버거운 삶’이라는 것이었다. 한갓진 삶 속에서 외침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세상을 향한 하소연 정도는 하고 싶었을까, 주민 센터에서 하는 교양강좌에 시를 배우러 다니는 그녀에게 세상은 잊지 않고 불친절한 손을 내민다. 여학생을 자살로 몰고 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손자를 구명하기 위해 피해 여학생의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찾아간 목적은 잊어버리고 잡담만 나누고 돌아오며 그녀가 보이던 치매증상이 지금 생각하니 더 안타깝다.

영화 『Away From Her(2008)』에는 함께 산책하고 함께 책을 잃고 함께 밥을 먹으며 44년 동안이나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에게 헌신해온 부부가 등장한다. 영화 『닥터 지바고(1978)』에서 지바고를 사로잡은 도발적 여인 라라 역을 맡았던 쥴리 크리스티가 이 영화로 그 해 골든 글러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인기 있는 교수였던 남편은 많은 여학생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한 번도 아내를 배신한 적이 없었고 아내도 남편에게 일편단심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쳤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 날부턴가 알츠하이머가 찾아온다. 방들의 불이 하나 둘 꺼져 마침내 온 집이 어둠 속에 잠기듯 그녀는 기억을 하나하나 잃어버린다. 조금의 기억이라도 있을 때 요양원에 들어가야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온전히 자신으로 해 힘겨울 남편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남편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녀가 요양원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영화 제목처럼 Away from her, 그녀로부터 떨어져서 그녀의 새로 시작하는 사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내의 행복을 위한 남편의 기막히게 눈물겨운 선택이었다.

영화 『스틸, 앨리스(Still Alice(2015)』에서 유명한 언어학 교수 앨리스는 좋은 아내, 존경받는 어머니였다. 단어들을 하나하나 까먹어가던 그녀가 의사로부터 젊은 나이에도 걸릴 수 있는 조발성(早發性)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발병을 알리고 유전이 될 수도 있는 병이니 진단을 받으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양성으로 판정 된 큰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연극배우의 길을 접어두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돌아온 딸이 마지막 남은 어머니의 기억이라도 붙잡아보려고 책을 읽어주고는 무슨 내용이냐고 물을 때 그녀는 대답한다. “Love”. 마지막까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사랑이라고 읽어도 될지 망설여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자신의 발병 사실을 알리고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 연설을 한다. “저는 자신에게 순간을 살라고 말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을 사는 것과 상실을 인정하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살아온 순간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도 그녀는 Still Alice, ‘여전히 앨리스’인 것이다. 배우 윤정희도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윤정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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