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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 연복군 송설헌 선생 유허비 제막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11.29 10:44
  • 호수 741
  • 댓글 0
문경시 화장에서 제막식
연복군 영정
연복군 종택
장수면 화기리에서 고유제
제막식에 400명 참가
장성하 회장
장덕필 종손
유허비 전면

15일 장수 화기에서 사당 고유제, 16일 문경 화장에서 제막식
영남불천위 종가, 영주·문경·안동·예천 등 문중 400명 참례

인동장씨 연복군파 전국종회(회장 장성하)는 연복군(延福君) 송설헌(松雪軒) 휘 말손(末孫) 선조께서 벼슬을 그만두시고 낙남하셨던 문경(예천) 화장(花庄) 정금산 아래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16일 제막식을 거행했다.

 

연복군 종택과 장말손유물각

영주(장수)IC 사거리에서 예천방향으로 200m 가량 가다보면 ‘장말손유물각 표지판’이 보인다. 좌회전하여 600여m 내려가면 고풍스럽고도 위엄 있어 보이는 인동장씨 종택을 만나게 된다. 종택 좌측 유물각에는 장말손 초상, 고문서, 홍패·백패, 유품, 교서 등 보물 5점을 비롯한 수 천점의 유물·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유허비 제막식을 하루 앞둔 15일 종택 불천위사당에서 연복군송설헌장선생유허비 제막 고유제가 봉행됐다. 고유제에는 장덕필 종손, 장성하 회장을 비롯한 종중 30여명이 참례했다.

이날 고유제 집사에는 헌관 장덕필 종손, 독고유 장병국 전 회장, 봉향 장봉덕 씨, 봉로 장범전 씨가 천망됐다. 고유제는 참례자 취위, 삼상향, 헌작, 독고유, 재배, 예필, 음복 순으로 진행됐다. 고유문은 「부군께 고하옵니다. 공께서는 국난을 극복하시고 조선 개국 공신이십니다. 화장에 낙향 하신 후 오랜 세월동안 기록을 갖추지 못하다가 때는 늦었지만 종의(宗議)를 모아 유허비를 세웁니다. 아름다운 업적들을 드러내 감히 고하옵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잔을 드리오니 편히 드시옵소서. 정성을 다해 삼가 고합나이다」

 

연복군 송설헌 선생은 누구?

공은 1431년(세종13) 칠곡군 석적면 발영전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인동이며 휘는 말손(末孫)이고 자는 경윤(景胤)이며 호는 송설헌이고 연복군이라는 봉군(封君)을 받았으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공은 23세 사마시,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35세(1465) 함길도병마도사·북평사, 36세에는 야인의 침노를 격문과 담소로 물리쳤다. 11월 환조(還朝)하니 임금께서 공으로 패도(佩刀,보물881호)를 하사했다. 37세 예조좌랑 겸 예문관응교에 오르고 3개월간 ‘이시애란’을 평정함에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39세 공신회망록과 교서가 내려졌다. 41세 장악원정·절충위부사직에, 43세 첨지중추부사, 46세 공조참의와 예조참의를 거쳐 6월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에 올랐다. 그해 가을 왕명으로 장말손 영정(보물502호)을 그리게 하였다. 1482년(52세) 봄에 벼슬을 사임하고 예천 화장으로 낙향 송설헌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53세 연복군(延福君)의 명의 받았고, 1486년 향년 56세로 서거(逝去)했다.

王이 부음을 듣고 예관을 보내고 국사(國師)로 하여금 예천 호명에 산소를 정하여 예장했다. 그해 가을 자헌대부 이조판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춘추관성균관사, 세자시강원찬선에 증직되면서 안양이란 시호를 받았다. 1489년 성종대왕이 영정(影幀)을 내리고 불천위(不遷位)를 명했다.

 

송설헌 선생의 선조(先祖)

공의 6대조인 계(桂)는 인동장씨 직제학계(直提學系)의 1세조로 집현전 직제학 벼슬을 지냈으며, 5대조인 비(備)는 예문관 제학의 벼슬을, 4대조 원우(元祐)는 행수별장이고, 증조 전(戩)은 삼사우윤, 조부 천서(天叙)는 호조참의에 증직됐고, 고(考) 안량(安良)은 행 홍산현감 증 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 어머니 정부인은 단양지씨이니 부사(府使) 을성(乙成)의 따님이다.

 

송설헌 선생의 후손들

장자 맹우(孟羽) 교리공(校理공)은 23세 진사에 합격하고 40세에 문과에 급제 1509년 형조정랑과 황해도사를, 차자 중우(仲羽)는 선략장군를 지냈다. 교리공의 장자 응신(應臣)은 생원, 차자 응필(應弼)은 적순부위를 지냈다. 응신은 인동장씨 영주 입향조로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문하에 있다가 사위가 되었고 퇴계 선생의 처 이모부가 됐다. 장자 윤희(胤禧)는 대호군, 차자 순희(順禧)는 주부이고 3자 수희(壽禧)는 퇴계의 제자이면서 처이종(妻姨從)이기도하다. 수희가 백운동서원에서 학문을 닦을 때 서원의 사액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여 ‘소수서원’ 사액(1550년)이 내리도록 하는데 밀알이 되었고, 1554년 이산서원 건립 당시 수장(首長)으로 창건과 운영의 주역이 됐다. 현손 언상(彦祥,1522~1566)은 대호군으로 초곡에서 꽃계로 이주하여 연복군종택을 건립했고, 언정은 호군, 언기는 부사용을 지냈다. 계훈은 진사이고, 여격(汝翮)은 군자감정이다. 여화(汝華1566-1621,수희의 아들)는 호가 사계(沙溪)이고 성균관 진사로 평은 금강에 터를 잡아 많은 인재 배출했다. 6대손 주남은 진사, 준남(俊南)은 문과에 올라 사헌부 감찰, 신(號 錦江)은 학행으로 개령현감, 응필의 후손으로 원경의 6대손 진(瑱)은 문과에 올라 강계도호부사, 후상(后相)은 문과급제로 사예와 양산군수, 위긍(湋恆)은 문과급제로 자인현감, 화식은 고종 때 한성판윤, 용환은 용궁현감, 봉환은 미국공관 서기관, 기연(記淵)은 문과로 군수에 올랐다.

 

제막식에 영남문중 400명 참례

이날 제막식에는 장욱현 시장, 박찬극·서중일·권오엽 영주3향교 전교, 김숙진 전 전교, 권무탁 유도회장, 박약회, 담수회 등 영주유림, 문경유림 고영조 대표 및 한시회원, 영남종가모임인 영종회(嶺宗會), 영주·안동·예천·문경·상주 각 문중 등 400여명이 참례했다.

오전 11시 장정덕 전국종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개회하여 국민의례, 연복군 선조에 대한 묵념, 내빈소개, 장사원 유허비건립추진위원장 경과보고, 장성하 회장 인사, 장덕필 종손 인사, 장욱현 시장 축사, 장윤석(전 국회의원) 후손대표 인사, 각계 대표들과 함께 당긴 제막행사, 각 기관단체에서 보낸 축전 및 화환 소개, 오찬 순으로 진행됐다.

장성하 회장은 인사말에서 “충과 의(義)의 상징적인 인물이시고 공신이셨던 연복군 선조께서 타계하신지 553년이 지나도록 유허비를 세우지 못했던 후손들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늦었으나 문경시 산북면 정금산(丁金山) 문필봉(文筆峰)을 배산으로 하고 천마산을 안산으로 한 이곳에비를 세우게 됐다”며 “가문이나 나라가 한 사람으로 인해 번성의 기초가 되고 발전의 초석이 된다면 생의 가치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유허비를 입석하면서 선조의 행적을 더듬고 본받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장덕필 종손은 감사의 말씀에서 “오늘 제막이 있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신 장성하 회장님, 장사원 추진위원장님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뜻을 함께하신 종중 여러분 모두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며 “선조님들께서는 가문의 융성과 발전은 선(善)을 실행하는 것이라 하셨으니 모든 후손들은 언제나 선덕(善德)을 쌓아 널리 베품을 만세토록 가본으로 삼자”고 말했다.

연복군유허비는 전면에 「延福君松雪軒張先生遺墟碑」라 쓰고, 비문은 「선조께서는…으로 시작하여 낙향 세거지, 출생과 생애, 국난극복과 적개공신, 공의 후손들, 명(銘)에 이르노니 선덕을 쌓아 널리 베품을 만세토록 가본으로 삼을지어다. 2019년 11월 16일 연복군 17세 종친회장 장성하(張星河) 삼가 글을 짓고, 16세 종손 장덕필(張德必) 삼가 글을 쓰다」 비 3면에 총 2천 400자로 비문을 새겼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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