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3,전 영주문화원 이사)

금양정사는 영주시 풍기읍 금계동에 위치한 조선중기 문신(文臣)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하여 세운 정사(精舍)이다. 금양정사는 금계가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1563년(명종18) 금계가 타계한 후, 같은 해에 완성되었다. 금계 황준량은 1517년(중종12)아버지 참봉 치와 어머니 창원황씨(昌原黃氏)사이에 풍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청수한 용모와 남다른 자질로 사람들은 기동(奇童)이라 불렀다고 한다.

18세에 진사시에 오르고, 이어서 생원시를 거쳐 24세가 되던 1540년(종종35) 문과급제에 올랐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학록(學錄), 전적(典籍), 학정을 지내고, 중종, 인종 양대 임금의 실록편찬에 참여하는 등,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어버이를 위하여 지방직을 지원하여 신녕현감, 단양군수를 거쳐서 1506년(명종15) 성주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성주에서 4년을 보내고 1563년(명종18)병(病)을 얻어서 사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예천지경에 이르러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4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금계를 가장 아끼던 스승 퇴계는 제자의 행장에서 ‘금계는 풍채가 뛰어나고 미목(眉目)이 그림 같으며 재주가 뛰어나서 앞으로 큰일을 해낼 제목이었다’라 하였다. 한강(寒岡)은 금계의 문집서문(文集序文)에서 ‘그의 시(詩)를 보면, 성정(性情)을 근본으로 하고, 음률에 맞아 화(華)와 실(實)을 함께 갖추어서 그 뜻이 매우 심원(深遠)하였다. 더욱 문장은 뛰어나서 붓을 잡으면 그침이 없었고, 글을 읽으면 마치 봄 구름이 공중에 나르는 듯 하고, 하늘에 꽃송이가 햇빛에 번득이는 듯하여 원숙하고 혼후(渾厚)하기 그지없었으니 어찌 심상(心象)한 문인재자(文人才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금계는 농암 이현보의 아들 문량의 사위로 퇴계는 이웃마을의 선배인 농암을 존경하여 자주 방문을 하였는데, 금계가 퇴계를 처음으로 만난 곳도 이곳 처가에서다.

그로부터 금계는 17년 연배인 퇴계를 스승으로 받들면서 심경과 근사록 등 여러 성리(性理)심학의 공부를 접하게 되었고, 이어서 주자를 깊이 감발(感發)하여 학문 탐구에 더욱 분발을 하였다. 뒤에 금계가 목민관으로 있을 때, 온갖 정성으로 백성을 보살폈고, 교학에 힘을 써서 향교를 새로 짓고, 선비들의 학업을 도왔다.

공(公)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1557년(명종12)이다. 단양고을은 유난히 피폐하여 조정에서도 특별히 유능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금계가 선택이 되어 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단양에 부임하여 경내를 살펴보니, 제반 농업기반이 열악하고, 백성들의 의욕은 절망적이며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가 부족하고 산림은 매우 황폐하였다. 그 원인이 관의 오랜 폐단임을 느끼고, 금계는 <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알아야 함에도 이 지경으로 버려두었으니 관리는 있어서 무엇을 하겠는가?>하며 깊은 탄식을 하고, 새로운 단양고을을 일으키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등, 자못 비장한 결의로 임금에게 조선의 4대 상소(上疏)인 유명한 장문의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

5천 1자를 감히 올리게 되었다.

이 상소에 대하여 명종 임금은 <모두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이다.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라고 비답하시고, 특명을 내려 단양군에 공납 20여 가지를 10년간 면제시켰다. 이로 인하여 단양고을은 생기를 되찾았고, 흩어져서 떠돌던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금계는 친척이나 이웃들이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되면, 내일과 같이 도왔으며, 공직생활에서도 한결같이 청렴하여 20여년 벼슬길에 3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나, 그가 운명(殞命)했을 때, 염습에 쓸 만한 천이 없어서 베(布)를 꾸어서 썼다 하고, 관을 채울 옷가지가 없음을 보고 가까운 사람들조차 금계의 생활이 이토록 청빈했음에 감탄을 마지못했다고 한다.

뜻밖에 금계의 부음을 받고 통석함을 마지못한 퇴계는 이때 몸이 불편하여 아들 준을 보내어 전물(奠物)을 갖추어 조사(弔辭)하게 하였는데 그 제문에서,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음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참인가 꿈인가? 놀랍고 아득하여 목이 메는구나.>하였다. 또한 행장(行狀) 끝맺음에서, <그대 늘 내가 늙고 병들어 견디기 어려울 것을 근심하더니 어찌 짐작이나 했으리요. 오늘 늙고 병든 내가 도리어 그대 앞에서 곡을 하게 될 줄이야……> 세월이 흐르면 물(物)은 없어지고 정신만 남는다. 금양정사는 오늘날 삭막한 현실 속에 정신적인 교훈을 주는 등불이 되고 있다. <參考文獻: 錦溪文集, 榮州榮豊鄕土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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