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조사는 화엄종의 개조(開祖)이다. 성은 김씨. 법명은 의상. 아버지는 한신이다.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서 19세에 경주 황복사(지금은 없어짐)로 출가하였다.

650년(진덕왕 4) 화엄교학을 배우기 위하여 원효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가는 배편을 구하고자, 당주계(唐州界)로 향하던 중 산중에서 날이 저물고 큰 비를 만났다.

어둠속에서 움막을 발견하고 거기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원효스님은 잠결에 몹시 목이 말라서 옆에 있는 그릇의 물을 마셨다고 한다. 날이 새고 주위를 살펴보니 움막 속은 무너진 무덤이었고, 물그릇은 해골이었다. 이튿날도 비는 계속 내려서 어느 빈집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원효스님은 무서움과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효스님이 생각하기를 <지난밤에는 무덤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도 편히 잠을 잤는데, 오늘은 집안에서 오히려 무섭고 두려움을 느끼니 이러한 까닭은 오직 내 마음하나(唯識. 사람마음 본체)의 탓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원효스님은 여기서 유심(唯心)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의상은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혼자서 요동지방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에게 첩자로 잡혀 수십 일간 조사를 받고 풀려나자,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발길을 돌렸다. 의상은 661년(문무왕 원년) 단독으로 다시 유학의 길을 떠나 당나라로 들어갔다. 이때 그의 나이가 37세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의 고종이 신라를 침략 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조정에 알렸다고 한다.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서 671년(문무왕11) 낙산사를 짓고,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때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세음 신앙을 알게 하는 261자의 명문이라고 한다.

676년(문무왕16) 부석사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해 건립한 사찰은 오악(五岳. 東으로 吐含山, 西로 鷄龍山, 南으로 智異山, 北으로 太白山. 中央에 八公山.)을 중심으로 부석사, 미리사, 화엄사, 해인사, 보원사, 갑사, 화산사, 범어사, 옥천사, 국신사 등을 창건하였고, 이밖에도 불영사, 삼막사, 초암사, 홍련암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모든 사찰들이 모두 의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믿기로는 어려우나, 의상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음은 분명하다. 그에게는 삼천여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이름난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 진정, 진장(眞贓),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같은 제자들이 있었다.

의상은 부석사에서 40일간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椎洞. 지금의 비로사 자리)에서 화엄경을 90일간에 걸쳐서 강의하였다. 제자들이 질문을 하면,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서 의심나는 점을 풀어서 계발(啓發)해 주었다.

의상은 의복과 병과 발우 3가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았다. 또 문무왕이 어느 때,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고 관리에게 명령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은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땅에 선(線)을 그어놓고 이것이 성(城)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넘지 못할 것이며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돌로 장성(長城)을 쌓아 놓아도 재해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역사(役事)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의상조사는 702년(성덕왕 원년) 78세로 입적하셨다. 나라에서는 ‘해동화엄조사’란 시호를 내렸고, 고려 숙종은 ‘해동화엄조사 원교국사’라고 추증했다. 의상조사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도 부른다.

의상조사가 창건하신 부석사는 1천343년 후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參考. 韓國民族文化 大百科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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