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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 금성단과 흑석사 아미타불에 깃든 금성대군 애사(哀史)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11.25 18:05
  • 호수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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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단 춘향대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가운데)
초암사(현재모습)
흑석사 아미타물 복장기(복장유물)
흑석사 아미타불 보건문(복장유문)
국보 제282호 목조아미타여래좌
두레골 금성대군당(혈석봉안)
왕실시주자 가계도

금성단, 금성대군 유배지에 단을 쌓아 그 혼령 모신 곳
흑석사 아미타불상,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상
황준량의 시, 초암사 ‘홀로 남은 불상’ 흑석사 아미타불

‘순흥’하면 정축지변 참화(慘禍)가 떠오르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애사(哀史,슬픈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순흥에는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곳에 단을 쌓아 대군을 추모하는 금성단이 있고, 대군의 피 묻은 혈석(血石)을 모신 두레골 서낭당도 있다. 또 금성단 인근 초암사에 봉안돼 있다가 지금은 흑석사에 모셔진 아미타불상은 금성대군과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됐다는 최근 연구발표가 있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금성대군이 남긴 ‘정의의 문화’는 순흥에서 꽃피워져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진행 중이다.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

1426년(세종8년) 3월 28일,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왕자 이유(李瑜)가 태어났다. 세종의 적자들 중 여섯째로 1433년(세종15년)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면서, 어린 임금 단종이 즉위한 상황에서 야심 많은 수양대군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결국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다.

세조 즉위 후 1456년 사육신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한 직후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안치(安置)된다.

 

‘금성대군신단’이란

금성단은 충절의 상징인 금성대군과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정축지변으로 희생된 순흥의 순절의사들을 제향하는 제단이다. 정축년(1457) 6월 단종복위 거사가 발각되어 단종은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고, 금성대군은 7월 안동으로 압송 후 10월 사사(賜死)됐으며, 이보흠은 박천(博川,평안북도)에 유배됐다가 10월 교살(絞殺)됐다.

이 때 부(府)는 혁파되고 관아와 집들이 불탔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죽계를 피로 물들게 했다. 226년이 지나서 부가 회복(1683년)된 후 부사 정중창(鄭重昌)이 1693년 처음 단(檀)을 설치하였고, 1719년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상중하 3단으로 조성했다. 1742년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지금의 품(品)자형 제단을 설치하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우는 등 지금 모습을 갖췄다. 금성단에서는 1719년 이래 지금까지 30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추모제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왕조의 비극

조선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은 제4대 세종(1397~1450)이며 가장 연민을 느끼게 하는 왕은 세종의 손자인 제6대 단종(1441~1457)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세조(1417~1468)는 억불숭유 정책 속에서도 불교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인 왕이었지만, 부처님의 자비와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이다.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조성 당시 아미타불·관음보살·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상이었는데 현재는 본존인 아미타불상만 남아 있다.

동국대학교 유근자 교수는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불광출판사. 2017)’를 통해 “이 불상은 조선시대 가장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단종과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했던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상으로 판단된다”며 “1457년 세조에 의해 처형된 단종과 금성대군을 위해 그 1주기가 되는 1458년 금성대군을 아들처럼 보살폈던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가 주도해 만든 아미타삼존상”이라고 했다.

 

흑석사 아미타불 복장기(腹藏記)

1986년 흑석사에 도둑이 들었다. 흑석사 부봉 스님이 새벽 예불을 드리려 대웅전에 가보니 불상이 없다. ‘상호 큰스님께서 팔십여리 산길을 직접 업고 온 불상인데…’ 즉시 경찰서와 시청에 연락하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날 오후 절 인근에서 불상과 복장유물이 발견돼 수습했다. 당시까지 복장유물의 존재를 몰랐는데 도둑이 복장유물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이후 문화재청과 학자들의 연구와 고증과정을 거쳐 불상과 복장유물은 1993년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됐다.

아미타불 복장기는 옅은 청색으로 물들인 명주(140cm)와 그 뒷면에 이어 붙인 같은 폭의 한지(230cm)로 연결되어 있는데 의빈 권씨를 비롯한 태종의 후궁들과 효령대군과 세종의 사위 안맹담을 비롯한 왕실 종친, 제작에 참여한 장인과 스님 등 275명의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금성대군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복장 속에 남겼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복장 타임캡슐 해석을 통해 5백 수십 년 전 아미타불상에 깃든 조선왕조의 비극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심금(心襟)을 울리는 권선문

1458년 10월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는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영주지역 정암산 법천사(초암사로 추정)에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한다.

1457년에 작성된 권선문은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금성대군이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서방의 교주 아미타불은 이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인연이 있어 중생을 인도하여 서방정토 위로 들어간다. 관음보살은 괴로움을 구제해 달라는 소리를 듣고 중생의 고뇌를 구제한다. 지장보살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도달하는 곳에 있으면서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제해 낸다. 이 삼존의 위엄과 덕행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빈도(貧道)가 삼존의 상을 조성하려 했으나 힘이 미약하여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널리 존귀한 사람과 미천한 사람들에게 고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열반의 아름다운 뿌리를 심어서 다행이다」라고 적었다.

 

아미타불을 조성한 왕실 사람들

유 교수는 복장기록 연구를 통해 “흑석사 아미타불상이 완성된 것은 1458년 10월이고 이때는 단종과 금성대군의 1주기가 되는 해”라며 “따라서 이 아미타불상은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 복위 사건으로 1457년 10월에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 권선문과 복장기에 등장하는 시주자들을 살펴보면 모두 왕실 관련 인물들로 금성대군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시주에 참여한 왕실 사람들로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1396-1486)와 그의 아들 의성군 이채(李菜, 1411~1493), 세종의 딸 정의공주(1415~1477),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1468), 명빈 김씨(?~1479), 신빈 신씨(?~1435) 등인데 모두 금성대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시주자 가운데 의빈 권씨가 아미타불상 조성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유는 금성대군의 어머니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권유로 의빈 권씨가 대군을 친자식처럼 보살폈으며, 금성대군 또한 의빈 권씨를 친 어머니처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암사 아미타불이 흑석사로 간 사연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원래 정암산(井巖山) 법천사(法泉寺)의 불상이라고 하나 어딘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국대 유근자 교수는 당시 상황에 비추어 초암사로 추정하고 있다.

흑석사를 중건한 상호스님(1895-1986)은 일제말엽 초암사에서 아미타여래좌상을 만난 것으로 보여진다. 1949년 소백산 일대 소개령이 내려지자 상호스님은 초암사 목재를 옮겨 흑석사를 중건하고 아미타불을 흑석사에 봉안하게 됐다.

 

황준량의 시와 초암사 아미타불

유 교수는 흑석사 아미타불 연구에서 금계 황준량의 시 ‘초암사에 홀로 남은 불상’이 현재 ‘흑석사 아미타불’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황준량(1517-1563)은 초암사에서 주세붕(1495-1554)과 정사룡(1491-1570)의 시에서 운을 따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산바람이 나를 앞서 소나무 문을 여니/절 무너져 스님 없고 불상만 남아있네/흰 돌 그림자는 붉은 철쭉을 흔들고/붉은 절벽 향초는 곤륜산서 늙어가네.」 황준량의 시에 등장하는 ‘초암사에 홀로 남은 불상’이 현재 영주 흑석사 극락전의 아미타불상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1458년 조성 당시에는 아미타·관세음·지장보살 삼존으로 만들어서 ‘정암산 법천사’에 주불로 봉안했다고 권선문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16세기 황준량의 시에는 ‘홀로 남은 불상’으로 등장해 이미 이때부터 아미타불만 남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초암사는 금성대군이 유배된 곳인 경상도 순흥(지금의 영주)에 위치하고 있고, 금성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단인 금성단(金城壇) 인근에 있다. 의빈 권씨는 금성대군을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해 근처 사찰에 봉안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유 교수는 “이 불상이 초암사에서 흑석사로 이동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황준량의 시에 등장하는 그 불상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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