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석희

지난 27일은 한국영화 100년을 맞는 날이었다. 1919년 10월 27일, 종로의 단성사에서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되고 꼭 백년이 흘렀다.

영화의 탄생은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라는 영사기를 처음 발명한 1894년을 기점으로 한다. 움직이는 물체를 카메라 앞에 연속적으로 노출시켜 1초에 60매의 필름을 쓸 수 있을 정도까지 발전시켜 ‘움직이는 그림’, 즉 활동사진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움직이는 그림을 의미하는 무빙 픽쳐(moving pictures)에서 영화를 뜻하는 무비(movie)라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움직이는 사진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구경거리 수준이었지만 1903년 미국에서 스토리가 있는 영화 <대열차강도(The Great Train Robbery)>가 상영되면서 본격적인 영화시대가 시작되었다. 비록 상영시간 8분짜리 무성영화의 수준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은 것은 그날 종로의 단성사에서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날이기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도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필름들이거나 일본인들이 제작한 것들이었다. 한국인의 자본으로 한국인이 감독하고 한국인들이 배우로 출연한 순수한 우리 영화는 <의리적 구토>가 처음이었으므로 그날이 한국영화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요즘 우리가 쓰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리적(義理的) 구토(仇討)’라는 해괴한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의리적’이라는 말은 올바른, 정의로운이라는 뜻일 테고 구토(仇討), 또는구투(仇鬪)라는 것은 토하다의 구토(嘔吐)가 아니고 ‘원수와 싸우다’. 즉 복수를 말하는 것이니 정당한 복수라는 의미쯤으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그러나 <의리적 구토>는 요즘 영화와는 거리가 있는 ‘연쇄극(連鎖劇)’이었다. 연극이 주를 이루면서 무대에서 실연(實演)하기 힘든 활극이나 자연의 풍경 같은 것만 영화로 찍은 것이었다.

완전한 극영화의 탄생은 1923년 <월하(月下)의 맹서(盟誓)>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1926년에 나온 비운의 천재 나운규 각본, 감독, 주연의 <아리랑>은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린 최초의 작품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변사가 무대 옆에서 내용을 설명해주는 무성영화였었다. 음성과 음악, 음향을 영화 장면 속에 끼워 넣는 토키(talkey)가 등장한 것은 1935년 <춘향전>에서였다.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6.25가 터지고 우리 영화는 암흑기를 맞지만 1956년 조선일보에 연재되면서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정비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자유부인>의 흥행을 시발점으로 196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영화에 열광하던 이탈리아 사람들을 그린 영화 <씨네마 천국>과 비슷한 풍경이 우리나라에서도 연출된 것이었다. 이 글의 제목을 <씨네마 한국>으로 잡은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TV도 없던 시절 대중들에게 극장구경(그 시절 영화 관람을 그렇게 불렀었다)은 거의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한 해에 수백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신성일, 김지미 같은 인기배우들이 몇 편씩 겹치기 출연을 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너나할 것 없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고단해서 (그게 비록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기대야 할 것이 필요했던 그 시절, 힘겨운 하루의 노동을 끝낸 사람들은 극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던 50년대 중반 영주에도 지금의 분수대 옆에 본격적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생겨났다. '영주극장'이었다. 새 영화가 들어오는 날이면 영화 포스터로 도배한 극장 전속의 하꼬차(상자처럼 네모반듯한 그 차를 일본말로 그렇게 불렀었다)가 시내 전역은 물론이고 면 단위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기대하시고 고대하시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여성필견(必見, 여성이라면 누구나 꼭 봐야 한다는 뜻이리라)의 영화” 어쩌고 하면서 확성기를 틀어대었었다. 눈물의 시대였다. 악질 왜놈 순사가 힘없는 조선 백성을 괴롭히는 장면에서는 비분강개의 눈물을 흘리고, 가난한 순이가 가슴에 품은 남자를 두고 부잣집 영감에게 팔려갈 때면 마치 제 신세인 양 서럽게 울고, 천신만고 끝에 피난길에 헤어졌던 식솔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돈을 내고서라도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영화는 세계 최빈국의 대중들을 위로했다.

요즘의 우리 영화를 보면 자랑스럽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함께 구현해내는 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있어 행복하다. 한국영화 100년을 맞은 올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었다. 내친 김에 내년 2월 미국에서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오스카상을 높이 쳐든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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