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 1952년과 2019년 현재 비교 취재

서여 민영규(연세대 교수)의 1952년 10월 애곡 문화재
2019년 10월, 애곡 문화재 행방 찾아 현재 모습 담아
희방사 월인석보 판본 6.25 때 소실 내력 ‘서여의 기록’

 

서여의 애곡 문화재 전시회

「서여 민영규의 1952년 10월, 전쟁피해 문화재 30일의 기록」 전시회가 2019년 5월 29일-7월 31일까지 연세대학교박물관에서 개최됐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서여 민영규(西餘 閔泳珪,1915-2005) 교수는 문교부(교육부)의 위촉을 받아 30여 일 동안 경북지역(영주중심)의 전시피해 및 홀대받는 사찰문화재 현황을 조사했다. 역사학자로서 소명을 다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나선 서여는 당시 군 작전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통제 지역인 죽령, 희방사 주변을 혼자 헤매기도 하고, 벌판과 숲속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 있던 석물들의 애곡(哀哭.슬피우는) 현장을 담아 역사에 남겼다.

 

서여가 본 1952년 10월

“희방사 일대에 여기저기 산재한 석불은 무지한 병사들의 사격 목표가 되어 한 몸에 수십 발의 탄환을 받아 길이 이촌(두 마디)이상이나 되는 상처가 무수히 났다”고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서여의 조사노트에 보면 보물 제116호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을 10월 20일 살펴본 뒤 “1950년 12월 10일부터 1951년 1월 중순까지 순흥에 국군이 주둔하면서 200m 거리 사격장에서 석불을 총격하는 등 총탄 흔적이 있는 문화재가 한 둘이 아니다”고 적었다.

보물 제59호인 영주 ‘숙수사지당간지주’는 국군 총격 흔적이 있고, 부석면 석조여래좌상은 1950년 10월 총격작전 도중 불두가 사라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전쟁이 벌어지자 문화재를 훈련용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서여는 “우리 국보는 처참한 전란과 무관심으로 목이 부러진 채 비바람을 피하지 못해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뜻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했다”며 “늦가을 찬바람에 찾는 이 없이 홀로 쓸쓸히 홀대 받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했다.

 

2019년 10월 현재 모습

본지는 2019년 10월. 67년 전 서여의 순례길을 재현하면서 영주시 관내에 산재한 애곡문화재의 행방을 찾아보고, 당시(1952) 서여가 담아낸 모습과 현재(2019)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다.

이원식 시민기자

 

1952년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영주초 앞)
1952년 영주동 석불좌상(영주초 앞)

영주동 석조여래입상(보물 제60호, 통일신라)
1952년 10월 7일 영주에 도착한 서여는 당시 영주초 교문 앞에 있던 석조여래 입상을 처음 만나 총상흔적 등을 조사했다. 1917년 가흥동 남산들 제방공사 때 발견되어 영주초 앞 도로 중앙에 임시로 모셔졌다가 1971년 영주공공도서관(세무서 서편) 정원으로 옮겨 보호각 안에 모셨다. 지금 60세 이상 되는 영주분들은 예전에 영주초 앞 축대위에 우뚝 서 있던 그 석불을 기억할 것이다.

 

1952년 영주동 석불좌상(영주초 앞)
현재 영주동 석불좌상(안양사 뜰)

영주동 석불좌상(통일신라)
영주초 앞 석조여래입상 뒤편에 있었다. 서여는 ‘영주 항마인석불상’이라고 기록하고 그림을 그렸다. 1971년 안양원(영주여고 앞)로 옮겨졌다. 현재 안양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우측 보호각에 모셔져 있다. 향토 사학자 최현교 선생의 사설(史說)에 의하면 ‘신라 정토사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2년 풍기 영전사 석조여래입상(풍기 영전사 포교당)
현재 풍기 영전사 석조여래입상(풍기 영전사 대웅전)

풍기영전사 석조여래입상(경북유형문화재 제324호, 통일신라)
10월 18일 오전 영주를 다시 찾은 서여는 풍기(풍기장날) 영전사 포교당에서 석조여래입상을 참배하고 불상의 모습을 상세그림으로 남겼다. 이 불상은 1924년 풍기 욱금동 영전사지에서 발굴되어 현장에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다가 1949년 영전사가 현 위치로 이전할 때 대웅전 중앙에 봉안했다.

 

 

1952년 부석 북지리 석조여래좌상-1(부석사 동편 절터)

 

현재 부석 북지리 석조여래좌상-1(부석사 자인당 서편불상)

부석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1호, 통일신라)
18일 오후 부석사에 도착한 서여는 저녁 예불에 참석하고 숙박했다. 19일 부석사 경내를 조사한 후 부석사 동편 1.5km 지점 절터에 방치된 석불을 만나 통곡한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부분적으로 파손이 심한편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완벽하게 남아있다.
1957년 들판에 있던 불상을 부석사 자인당(慈忍堂)으로 옮겨 모셨다. 현재 자인당 내 세 불상 중 우측(서쪽) 불상이다.
 

 

1952년 부석 북지리 석조여래좌상-2(부석사 동편 절터)

 

현재 부석 북지리 석조여래좌상-2(부석사 자인당 동편불상)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2호, 통일신라)
보물 제220-1호와 220-2호는 부석사 인근 절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9세기) 불상 양식이라고 한다. 220-1호와 같이 부석사 인근 밭에 방치되어 있다가 1957년 자인당에 모셔졌다. 두 불상의 조각 수법이 같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동일인이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자인당에 모셔진 세 불상 중 좌측(동쪽) 불상이다.
 

1952년 서여가 남신 사진(부석사 무량수전)
1952년 부석사 조사당

 

1952년 부석사 삼층석탑

 

1952년 부석사 당간지주
1952년 부석사 안양루

서여가 남긴 부석사 사진
서여는 19일 오전 부석사 경내를 조사하면서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19호 부석사 조사당, 보물 제249호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 부석사 당간지주, 부석사 안양루 등 사진을 남겼다.
 

1952년 부석면 석조여래좌상(부석국민학교 교정)
현재 부석면 석조여래좌상(부석사박물관 남쪽 뜰)

부석면 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
서여는 19일 오후 부석국민학교 교정에서 불두 없는 불상을 발견했다. 그의 노트에는 ‘부석면 항마인불상, 1950년 10월 10일 국군총격작전 때 불두가 사라짐’이라고 적었다.
이 불상은 원래 부석사 입구 밭 가운데 있었는데 1930년 부석국민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1970년 부석사로 옮겨져 현재 부석사박물관 남쪽 담장 아래 다른 불상 2기와 함께 안치돼 있다. 없어진 불두는 이전 봉안할 때 다시 제작했다.

1952년 순흥면 석교리 석조여래입상 (총상)사진전 대표사진
현재 순흥면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호각 보존)
현재 순흥면 석교리 석조여래입상(얼굴 총상흔적)
현재 순흥면 석교리 석조여래입상(귀밑 총상흔적)

순흥면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6호, 통일신라)
이번 전시회 표지 사진이 된 ‘석교리 석조여래입상’이다. 순흥초 동편 앞산 옛 승림사지(현 밭 가운데)에 있다. 서여는 10월 20일 본 불상을 살펴본 뒤 지역 주민들로부터 “1950년 12월 10일부터 1951년 1월 중순까지 순흥에 주둔한 군부대가 불상을 표적삼아 사격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분노한다. 서여의 노트에는 “당시 불상은 무릎까지 땅에 묻혀 있었고, 양팔과 얼굴, 볼 등 온몸에 총탄 흔적이 뚜렷했다”고 기록했다. 영주시는 1990년경 보호각을 지어 불상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1952년 순흥면 석교리 좌불(석교2리 밭둑, 1970 도난)

순흥면 석교리 좌불
서여의 조사에는 불두 없는 석교리좌불(사진)이 있으나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석교2리 지역 밭둑에 머리가 잘린 불상 1기와 좌대가 있었다. 1960년대 순흥면사무소 정원으로 옮겨 보존해 왔으나 1970년대 도난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1952년 순흥면 지동리 석불입상(지동리)
현재 순흥면 지동리 석불입상(봉서루 남서쪽 밭둑)

순흥면 지동리 석불입상
지동리 석불입상은 봉서루 남서쪽 밭둑에 있다. 서여가 찍은 사진에 보면 현 위치 허술한 보호각 속에 모셔져있다.
서여는 “총상의 흔적은 없다. 불두는 후세에 새롭게 제작됐다”고 기록했다.
지금도 지역주민들이 초하루 보름에 이 불상에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1952년 서여가 남긴 사진(순흥면사무소 앞 정원)
1952년 소수서원 숙수사지당간지주
1952년 소수서원 강학당

서여가 남긴 순흥 사진
서여는 순흥면 일대를 조사하면서 순흥면사무소 앞 정원 항마인석불과 신장상,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 사적 제55호 소수서원 강학당 사진을 남겨 이번에 전시했다.

 

1952년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대사동)

 

현재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가흥동)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보물 제221호, 통일신라)
10월 20일 오후 영주로 이동한 서여는 대사동(大寺洞,한절마) 마애여래삼존상을 정밀 조사한 후 영주 삼척여관에서 숙박했다고 기록했다. 삼존불 눈과 코 부위의 비정상적 마모는 불상의 코와 눈의 돌가루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이 있어 훼손된 것 이라고 전해온다.
2003년 6월 28일 집중호우로 삼존불 좌측 암벽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발견된 여래좌상이 그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1952년 상망동 석불좌상(동부국민학교 교정)
현재 상망동 석불좌상(상망동 신흥사 내 보호각)

상망동 석불좌상(경북문화재 자료 제277호, 통일신라)
서여는 10월 21일 새벽 영주동부국민학교 교정에서 석불좌상을 만났다. 당시는 동부국민학교 석불좌상으로 기록하였으나 1985년 상망동 신흥사 경내로 옮기면서 ‘상망동 석불좌상’이 됐다. 1950년대 동부초에 근무했던 교원에 의하면 문수면 초입 문수원(탑거리)에 있던 불상을 선생님과 아이들이 리어카로 운반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머리가 없어진 것을 1985년에 새로 만들어 붙였다. 서여는 동부국민학교 조사를 끝으로 이날 오전 대구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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