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방사 월인석보 이관 경비 신청공문을 베껴 기록
훈민정음 월인석보 판목이 소실된 사실을 보도한 신문

당시 도청 관계자 ‘무관심’ 때문에 소실
민영규 전 교수, 전쟁 후 조사에서 확인

A: 풍기 희방사가 어찌 되었는지 아십니까?

B : 모르겠는데요.

A : (안동)광흥사는 어찌 되었습니까? (예천)용문사 대웅전은 어찌 되었습니까?

B : 모르겠는데요.

A : 순흥 숙수사지 당간지주는?

B : 모르겠는데요. 언제 가보았어야지요.

이는 과거 연세대 교수를 지낸 고(故) 민영규(1915~2005)씨가 1952년 10월 경북지역을 돌며 문화재 피해 상황을 조사하던 중 경북도 문교사회국장이던 임모씨와 나눈 대화이다. 경북도 문정과, 문화계 책임자 백씨, 류씨와의 대화는 더 충격적이다.

‘거기에 대한 국가예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 전란으로 경북에 있는 사찰문화재로 손실 입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희방사요?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안동)광흥사도 그대로 있습니다’, ‘경북에 보물이 150점이 있는데 전부 완전히 보전되어 있고, 하나도 손실된 것은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혼란한 상태였지만 공직자들의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고장 희방사에 보관됐던 국보급 문화재인 ‘월인석보(月印釋譜) 목판’이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은 이처럼 당시 공직자들의 무사안일주의가 한몫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세대박물관이 지난 7월30일까지 개최한 기획전 ‘서여 민영규의 1952년 10월, 전쟁 피해 문화재 30일의 기록’에 나온 자료는 전쟁 당시 희방사 화재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충격적이다.

이번 기획전에는 1950년 1월 20일 경북 영주군수가 보낸 희방사 훈민정음 월인석보 판본 이관 경비 신청 관련 공문과 사연도 소개됐다.

이 공문에 따르면 당시 영주군수는 1950년 1월 10일 풍기면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떨어지자 경북도에 월인석보를 이관하겠다며 경비 10만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희방사는 다음해 1951년 1월 13일 오후 3시 미군에 의해 건물 5동이 소실되면서 불상, 월인석보 21권과 판목 222장, 훈민정음 판목 400여 장 등 소중한 문화재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영주군수가 경북도 문화사회국에 요청한 월인석보 등 문화재 이관 비용 10만원은 당시 시가로 쌀 7-8가마 값에 불과했다.

민 교수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공문은 물위에 떠도는 부초처럼 경북도청내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다가 아무 효과를 나타내지도 못했다”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예술적 가치가 풍부한 불상 및 중요문화재가 거대한 사찰과 함께 ‘한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애석해 했다.

또 “이관 비용 10만원이면 당시 시가로 백미 7~8가마 값밖에 되지 않는 돈인데 그 금액만 있었다면 능히 안전지대에 옮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한 경북도 당국자들의 소치는 실로 지탄받아야 하며 당시 문교사회국장이었던 임모 씨는 마땅히 이에 대한 총 책임을 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불관언(나는 상관하지 아니함)의 태도를 취해 막대한 국보의 소실을 보게 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한편 ‘월인석보’는 조선 세조 5년(1459)에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 한글로 편찬한 서적으로 한글 창제 초기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연보, 즉 석가모니의 일대기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현존하는 책 가운데 초간본 10권, 중간본 2권 3책이 보물 제745호로, 권11·12의 2권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돼 있다. 희방사는 선조 1년(1568)에 권1, 2를 다시 새겨 6.25전쟁 전까지 400년 동안 보관했다고 전한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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