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석희

신문이나 전파매체 등을 통해 스모킹 건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윤아무개의 검찰수사 팀이 조아무개 장관과 그 가족들의 수사 과정에서 스모킹 건을 찾을 수 있을까?’와 같은 용례에서처럼 말이다. 스모킹 건(smoking gun)이란 ‘연기가 나는 총’이라는 말이다. 탄환을 발사한 총은 그 총구에서 화약연기가 나기 마련이니 확실하고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뜻하는 말이 되겠다. ‘비겁한 행동’을 이르는 ‘등 뒤에서 쏘다(shoot behind the back)’이나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순간’을 뜻하는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려 있다(finger on the trigger)’라는 말처럼 미국어에 유달리 총에 대한 관용어가 많은 것은 그들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196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열세에 있던 존 F 케네디가 당선된 것은 유세 과정에서 그가 끊임없이 강조한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에 힘입은 바 크다. 그것을 ‘새로운 개척정신’으로 번역하지만 원래 ‘프런티어’는 개척지와 비개척지가 닿아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의 동부에 도착한 그들은 정착지를 조금씩 넓혀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개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만 사실은 총으로 인디언들을 위협해 쫓아내고 버팔로들(아메리카들소)을 죽이고 흑인노예들을 시켜 철도를 놓는 서부정복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프런티어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가 오늘의 미국이 되었다.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이겠지만) 개척을 하는 과정에서 총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미국 개척의 역사는 총의 역사였다.

세계최초의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250년도 채 되지 않는 일천(日淺)한 역사가 그들에게 신화와 전설을 필요하게 했다. 19세기 초, 다임 노벌(dime novel)이라는 게 유행했다. 다임이 10센트짜리 은화(銀貨)를 말하니까 지질(紙質)도 나쁘고 인쇄도 조악한 싸구려 소설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 소설들은 가상의 인물들을 내세운 허구도 있었지만 대개가 실존했던 서부개척시대의 전설적인 총잡이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영화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세계최초의 장편 극영화도 『대열차강도』라는 서부극이었다. 록키나 람보, 슈퍼맨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영웅신화의 창조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OK목장의 결투』에 나오는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와 알콜중독자 치과의사 출신의 총잡이 닥 할리데이, 영화 『역마차』에서 존 웨인이 그 역을 맡았던 전설적인 건맨 죠니 링고 등은 모두 서부개척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이었다. ‘20세기의 창조자’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도 이 시대의 전설적인 악당들이 등장한다. 상대를 때려눕힐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에 막대기를 하나 씩 그었다는 몽크 이스트맨, 말 도둑이며 잔혹한 노예사냥꾼 라자루스 모렐, 열네 살에 첫 살인을 하고 21명(그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인디언과 멕시코 인들은 계산에서 뺀 숫자다)을 죽이고 스물한 살에 죽어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라는 악명을 얻은 빌 해리건이 그들이다.

주윤발이 이쑤시개를 씹으며 나오던 홍콩느와르나 이소룡이 우스꽝스러운 노란 체육복을 입고 쌍절곤을 휘두르던 무협영화 이전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극장에 걸리던 외국영화의 절반은 서부영화였다. 어린 시절 우리는 게리 쿠퍼, 알란 라트, 존 웨인 등 미국 영화배우들의 이름들을 줄줄이 꿰고 다니며 게리쿠퍼와 죤 웨인이 결투를 한다면 누구 총이 더 빠를까를 두고 주먹다짐까지 하면서 다투기도 했다.

서부영화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이른 바 ‘최후의 결투(the last duel)’다. 다른 모든 복선(伏線)들은 이 마지막 결투를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두 사람이 20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총집의 단추를 풀고 마주 보며 서 있다. 바람이 휘잉 불어오며 회전초(回轉草)가 굴러다닌다. 둘 중 하나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Draw(뽑아)”. 총소리가 텅 빈 거리의 정적을 찢지만 두 사람은 그대로 서 있다. 한참 뒤에야 한 사람이 쓰러진다. 서 있는 자의 총에서 화약연기가 피어오른다.

검찰과 법무장관, 누구의 총에서 화약연기가 피어오를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게 하나 있다. 이 결투는 서부극처럼 끝나지 않을 것이다. 패자도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승자도 결코 해피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시 이 나라는 둘로 쪼개어져 더 맹렬히 싸울 것이다. 사실 서부극의 최후의 결투도 만들어진 신화일지도 모른다. 서부시대의 전설 와일드 빌 히콕도 술집에서 포커를 하다가 등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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