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청초

한 사람의 장관 임명을 두고 야당 의원들이 줄줄이 삭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삭발을 두고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구국(救國)의 결기라느니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저항수단인 삭발을 희화화(戱畵化)하고 있다느니 하는 요즘 각종 매스컴의 이른 바 논객(論客)이라는 사람들의 주장 어느 쪽에도 숟가락을 하나 더 얹을 생각이 없다. 어차피 그들은 서로를 설득할 생각도 없고 또 어떤 논리로도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비장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앉은 그들의 머리 위를 전기바리캉이 윙윙거리며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순식간에 민머리가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불경스럽게도 문득 까까머리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이발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땅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학창시절 교문에서 학생주임 선생님이 바리캉(프랑스의 제조 회사 이름 Bariquand이 보통명사로 잘못 쓰여 오늘에 이르고 았다)으로 머리 한 가운데에 신작로를 내거나 입대 전날 눈물을 삼키며 머리를 민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민머리는 자유에 대한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세 유럽의 수도승들이나 불가의 승려들이 머리를 깎은 것도 정진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구속한 것일 수 있다.

음악가 바흐나 헨델, 모차르트, 외국영화 속에 나오는 귀족들이나 법정에서의 판사들이 쓴 흰 가발(wig)은 권위를 상징하거나 멋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한때 유럽에서 가발이 유행했던 것은 매독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시절 흑사병 다음으로 무서운 병이었던 매독에 걸리면 머리숱이 빠져버려 유럽에 유달리 대머리가 많았다고 한다. 루이 13세는 바람을 피우는 왕비 때문에 고민이 깊어서인지 일찍 머리털이 빠졌다고 한다. 절대군주가 머리털이 없다는 것은 여러모로 위신이 떨어지고 모양이 빠지는 일이어서 흰 가발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부터 왕과 귀족들 사이에 하나의 사치로서 가발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그의 가발을 만들고 관리하는 장인들을 무려 48명이나 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여성들에게 머리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수단이었다. 왕비나 궁중의 여인들이 어여머리, 즉 가채를 쓰기도 했고 기생들은 트레머리를 얹어 멋을 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모던보이들 뿐만 아니라 모던걸들도 있었다.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이나 성악가 윤심덕 같은 이들이 자유연애를 주장하며 과감히 땋은 머리를 잘라버리자 사람들은 그녀들을 ‘모단(毛斷)걸’, 즉 머리를 자른 여자로 부르며 비웃기도 했다.

‘산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의 시 <여승>의 마지막 연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울면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영화 <삭발(削髮)의 모정(母情)(1965)>은 영주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제로 한 영화였다. 철탄산 아래 향교골에 살던 찢어지게 가난한 어머니가 일선에서 휴가 나온 아들에게 쌀밥에 고깃국 한 번 먹이고 싶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야 했던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어릴 적 우리 동네 이발소에는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이 걸려 있었다. 멀리 아득한 지평선에서는 해가 지고 있고 하루 일을 끝낸 부부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바르비종 화가의 그림에서 나는 저녁종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연탄난로 위의 커다란 양은냄비에서 물이 끓는 소리와 이따금 쓱싹쓱싹 가죽 띠에 면도칼날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아름다운 이발소는 그곳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이발하고 오라고 300원을 주시면 이발 아주머니를 기다렸다. 그 아주머니에게는 100원만 드리면 되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200원의 용처(用處)에 대해서는 묻지 마시라.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에게 두어 차례 머리를 쥐어 박히더라도 초등학교 남자아이의 주머니에도 그 정도의 비자금쯤은 있어야 했다. 동네 반장님 집 마당에 내놓은 나무 걸상에 앉으면 아주머니가 이발용구(그래봐야 바리캉과 면도기, 작은 가위 하나가 전부였지만)를 싸 온 보자기를 풀어 내 목에 두른다. 그리고 이발이 시작된다. 마당가의 맨드라미나 목단 꽃에 눈길을 주면서 얌전하게 앉아 아주머니의 손길에 머리를 맡긴다. 바리캉에 두피가 집히거나 뒷덜미가 면도칼에 베어 나지막한 비명을 지를 때마다 이미 이발을 끝냈거나 차례를 기다리는 동무들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킬킬대며 웃곤 하던, 어떤 때는 잠자리 한 마리가 콧잔등에 잠깐 앉았다 가기도 하던 나의 아름다운 이발소.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결의에 찬 표정으로 삭발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왜 뜬금없이 어린 시절의 이발소를 떠올렸는지, 세월이 하수상해서 내 연상 작용도 정상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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