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바로알기’ 좌담회 개최

세계유산 인증서
현장을 살펴보며 좌담
마애제각백운명
경자바위

「白雲洞」과 「敬」자, 신재(愼齋, 주세붕)가 손수 새겨
건물 배치와 단의 높이, 학문이 높은 경지로 진보함

문화재청은 지난 5일 서울 중구 소재 ‘한국의 집’에서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 기념식을 갖고 각 서원과 지방자치단체에 인증서를 전달했다.

6일 인증서가 소수서원에 도착하여 일반에 공개됐다. 그리고 이날을 기념하는 ‘소수서원 바로알기 좌담회’가 강학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좌담회에는 이갑선 소수서원운영위원장, 서승원 도감, 안병우 전 순흥향교 전교, 금창헌 市문화재관리팀장, 송준태 소수박물관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갑선 운영위원장은 인사에서 “평소 소수서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세계유산 등재에도 크게 기여해 주셨던 분들을 모시고 ‘소수서원 바로알기 좌담회’를 열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오늘 소수서원에 대한 잘못된 언론보도나 인터넷상 떠도는 잘못된 정보들을 짚어보고, 문헌 기록도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고 말했다.

경(敬)자 바위, 누가 새겼나?
먼저 소수서원 앞 죽계 건너편에 ‘白雲洞’, ‘敬’자를 새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글씨를 ‘누가 새겼냐?’에 대한 오보(誤報)가 있어 살펴보기로 했다.

서승원 도감은 “세계유산 등재 후 소수서원을 홍보하는 기사에 ‘퇴계 이황 선생이 쓴 것으로 전해오는 「白雲洞」과 신재 주세붕 선생이 쓴 「敬」자가 있다’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사”라며 “재향지(梓鄕誌,순흥지)에 보면 ‘경석(敬石)은 신재(愼齋,주세붕)가 손수 「白雲洞」과 「敬」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금창헌 市문화재관리팀장은 “경렴정에 걸려 있는 주세붕의 경렴정 시판에도 보면 ‘마애제각백운명(磨崖題刻白雲名), 석벽에 백운동 이름을 새기니’라고 썼다”며 “‘白雲洞’과 ‘敬’자는 주 선생이 새긴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敬자 바위와 귀신 울음소리에 관련하여 송준태 소수박물관장은 “서원을 세울 때 숙수사 불상을 경자바위 밑 소에 버렸는데 소의 깊이가 명주 한 꾸러미가 들어 갈 정도로 깊었다. 그 불상들이 밤마다 귀신 울음소리를 냈는데 이를 달래기 위해 주세붕 군수가 경(敬)자 바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는 사실이 아니다”며 “불교문화에서 유교문화로 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부정적 시각이 반영된 전설로 민속학적 측면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일부 사람들이 서원을 세울 때 사찰을 강제 점거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미 폐사된 터에 서원을 건립했다”고 말했다.

학문의 단계냐 & 사제의 높낮이냐
소수서원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숙식하던 장소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가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단이 높고 학구재는 한 단 낮고 지락재가 제일 낮다.

이를 두고 흔히들 ‘높은 곳은 스승의 숙소이고 낮은 곳은 유생들의 숙소’라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송 관장은 “유생숙소 건축물 단의 높이는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며 일신재 중건기를 근거로 들었다. 성언근(成彦根,1740-1818)이 쓴 일신재중건기에 「대개 학자의 공부는 마땅히 독서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지락재(至樂齋)가 맨 아래에 있고, 성현과 같이 되기 위해 학문을 구하기 때문에 학구재(學求齋)가 그 오른쪽에 있다.

다음 단계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기 때문에 일신재(日新齋)가 또 그 오른쪽에 있고,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고서 경(敬)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외면을 방정하게 하기 때문에 직방재(直方齋)가 또 그 오른쪽에 있게 됐다. 경과 의를 양쪽에 끼고 내면과 외면을 수양하게 되면 군자의 도가 이즈음에서 크게 완성되니, 이것이 ‘직방대(直方大, 그 행하는 바를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직방대가 된 뒤에 편안한 집에 넓게 거처하면서 천하에 교화를 밝힐 수 있기 때문에 명륜당(明倫堂)이 직방재 앞에 있는 것이다.

입문(入門)의 순서와 승당입실(升堂入室,학문이 높은 경지로 진보함을 이르는 말)의 차례와 공부가 편액의 글씨에 나열되어 있으니, 이 재실에 들어가는 자가 그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고서 위로 향하여 진보하는 것」이라고 썼다.

서승원 도감은 “유생들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明倫堂)이라 불리는 이곳 강학당에 들어와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며 “입원록에 보면 유생수가 적을 때 3명, 많을 때 30여명일 때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수서원에서 배출된 인재가 4천여 명에 달했다”고 말했다.

안병우 전 전교는 “원래 건물 배치와 단의 높이는 학문의 단계에 의한 것으로 전해져 왔으나 혹자에 의해 ‘스승의 그림자를 피해 뒷물림했다’, ‘일신재는 교수들의 숙소’, ‘직방재는 원장의 숙소’라고 잘못된 정보가 널리 퍼져 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수서원 건립에 대한 오해
숙수사(宿水寺)는 회헌(晦軒)이 소년 시절 글을 읽던 곳으로 소수서원 설립 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혹자에 의해 ‘숙수사를 철거하고 불상을 죽계에 수장시킨 후 소수서원을 건립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인터넷을 떠돌고 있어 바로잡아 보기로 했다.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숙수사는 몽고 침입 때 폐사했다는 설이 있고, 정축지변 때 폐사됐다는 설도 있다.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이에 대해 송 관장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불교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숙수사 역시 쇠락(衰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종국에는 정축지변(1457) 때 절은 완전히 불타 폐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그로부터 80여년 뒤 소수서원을 건립할 때 숙수사의 건물배치와 터를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건축부재도 일부 재활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문성공묘(文成公廟)의 특별함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 사액서원’이라는 특별함뿐만 아니라 또 뭔가 다른 서원과 다른 점들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했다.

금 팀장은 “사당에는 묘(廟)와 사(祠)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당을 사(祠)라 칭하고 있다. 다만 조정에서 많은 논의를 통하여 모든 대신들의 동의가 있고, 이를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 묘(廟)라 칭했다. 예를 들면 조선 역대 임금과 왕비를 모시는 종묘(宗廟)가 있고, 성균관에는 공자님을 모시는 문묘(文廟,공자의 존칭으로 대성지성문성왕묘의 줄임말)가 있다. 또 사(祠)는 충무공 이순신 사당을 ‘현충사’라 하고, 충장공 권율 장군의 사당을 ‘충장사’라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건립된 수많은 사당중에서도 문성공묘는 그 격이 특별함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안 전 전교도 “안향의 사당은 그 명호를 사(祀)가 아닌 묘(廟)로 지칭한 것은 동국성리학의 효시(嚆矢)가 된 문성공 안향의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갑선 운영위원장은 마무리 인사에서 “조선 중기 영남지역 교육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소수서원은 과거시험에 얽매인 관학(官學)과는 달리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됐으며, 출세주의가 아닌 호연지기를 길렀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유교적 인재배출의 요람이었다”며 “이번 유네스코가 평가한 성리학적 가치, 건축유형의 가치, 수신(修身) 영역의 가치 등을 잘 살려 소수서원의 철학과 사상이 새로운 한류로 세계에 전파되기를 기대한다. 오늘 좌담회에 감사드리고, 더 많은 관심과 연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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