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최대봉의 낭만에 대하여 첫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낭만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어떤 의미일까요? 12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는 아써왕 이야기와 같은 기사도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유행했었습니다. 그 소설들은 식자들이 아닌 일반대중들 사이에서 읽힌 이야기여서 오리지날 라틴어가 아닌 속어들, 즉 로망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로망이라고 불렸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이 아닌 규중의 아낙들과 서민들 사이에 한글 소설들이 유행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프랑스말 로망이 영어로는 로맨스가 되는 거지요. 말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뜻이 달라지거나 의미가 더해지는 샤례들이 있지요. 요즘 로망이라는 말은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은 꿈,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다거나 두껑이 없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연인과 함께 해변을 달리고 싶다거나 뭐 그런 걸 이야기할 때 쓰이기도 하지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사자성어가 뭘까요? 그렇지요.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여기서 로맨스란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요.
# 2 
19세기 초 일본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등 좋은 소설을 많이 쓴 나쓰메 소세끼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소쌔끼라는 된소리로 발음한 거 양해해주시겠지요. 이 작가가 프랑스말 로망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음을 차용해서 낭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낭만을 일본식 발음으로 하면 로우망이거든요. 그러니까 낭만이라는 한자어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거지요. 우리가 한때 프랑스를 불란서 스페인을 서반아 유럽을 구라파로 부른 것과 같은 거지요. 자, 이제 여기서 낭만이라는 말의 정의를 내려봅시다. 낭만이란 과학이나 관념, 이성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정서적 감성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변화와 속도와 이념과 거대담론과 정치적 이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낭만이라니. 무슨 그런 어마어마한 헛소리를 하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과학과 이성으로는 정확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새상은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정치와 이념으로는 정의로운 세상에 쬐끔 다가설 수야 있겠지만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낭만이 필요합니다.
# 3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가을이 오나봅니다. ‘지난여름’을 생각합니다. 낮은 사색하기에 너무 뜨거웠고 여름밤은 꿈꾸기에 너무 짧았습니다. 여러분의 지난여름은 어떠셨습니까? 일본의 보복적 수출규제와 한 사람의 법무부장관 기용을 두고 허구한 날 니편 내편 갈라져 층오와 비난으로 새고지는 싸움판 한 가운데서 혹 길을 잃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기는 올까요? 그리스의 영원한 연인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Aspri mera ke ya mas))들으시겠습니다. 우리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주인공 이민정이 옛날을 추억하는 장면에 흐르던 노래지요. 최대봉의 낭만에 대하여의 오프닝 뮤직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Aspri mera ke ya mas)) ‘소금처럼 짠 눈물로 시간을 적시게 될 거야/ 우리 그 쓰디쓴 여름날들을 함께 했었지/ 슬퍼하지 마/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
# 4
‘지난여름’이라는 말에는 해변의 이글거리던 태양뿐 아니라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 같은 게 있습니다. 잠시만이라도 짜증나는 현실에서 벗어나봅시다. 마술사가 소매에서 비둘기를 꺼내 듯 여름의 추억을 꺼내봅시다. 추억은 마법과 같은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지난여름이 늘 팍팍하고 따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신산(辛酸)한 세월이었지만 아름다웠던 유년의 기억은 늘 여름이 배경이었습니다. 우리의 아련한 여름의 기억 속에는 도시에서 온 얼굴이 말간 소녀가 있습니다.
  여름 시냇가에서 그녀를 만나 늦여름 들꽃을 묶어 수줍게 내밀고, 먼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비를 피해 수숫단 속으로 들어가고, 비에 젖은 소녀에게서 안개처럼 김이 피어올라 소년에게로 훅 끼쳐오고, 얼굴은 붉어지고 가슴은 쿵쾅거리고, 야속한 여름날의 짧은 소나기는 그만 그쳐버리고, 쏟아진 소나기에 물이 불은 개울을 업어서 건네주고, 소녀의 분홍 스웨터 앞자락에 소년의 등에서 옮겨온 검붉은 진흙물이 배어들고, 병약했던 그 소녀가 죽으면서 흙물이 밴 그 옷을 꼭 그대로 입혀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는, 중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황순원의 소설『소나기』이야깁니다.
# 5  
고등학교 국어책에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이 있었습니다. 릐브롱 산꼭대기에서 양들과 함께 생활하는 소년은 몇날 며칠을 사람 구경조차 못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던 어느 날, 보름치 식량을 실은 나귀 방울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인근 동네에서 제일 예뻤던 주인집 스테파네트 아가씨였습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불어난 도랑물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 그녀가 그 산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아래에서 소녀는 “양치기야, 너는 무슨 꿈을 꾸면서 잠이 드니?”라고 묻고, 소년은 ‘아가씨 생각, 아가씨 꿈을 꾼답니다.’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여름밤은 짧답니다, 아가씨. 금방 아침이 돼요.”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소녀는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소년의 어께에 기대 잠이 들고 소년은 생각합니다. 수많은 별들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께에 기대어 잠들어 있노라고.
  # 6
(고독한 양치기)라는 곡을 들어보시겠습니다. 지금 화면에 떠 있는 저 사람. 루마니아 출신의 작곡가이자 팬파이프 연주자인 게오르그 쟘피르입니다. 그리고 저 악기는 팬파이프지요. 그리스 신화의 숲속에 판이라는 이름의 반인반수 머리에 염소뿔이 달린 아주 흉측한 몰골의 사내와 아름다운 요정 시링스가 살고 있었습니다. 시링스가 얼마나 순수한 처녀였던지 음탕한 숲속의 신들 사트리오스들의 추근거림, 오늘날의 성희롱이겠지요. 그걸 피해 하루종일 도망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판이 그녀에게 반해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순수한 사랑이었지만 판의 흉한 외모에 겁을 먹고 그녀는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들이 판과 시링스입니다. 강가까지 달아난 시링스가 강의 요정들인 언니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꿔달라고 애원하자 그녀는 갈대로 변해버렸습니다. 오늘날 강가에 갈대숲이 있게 된 것도 그때부텁니다. 순수한 사랑이 좌절된 판의 애절한 탄식처럼 갈대들이 울었습니다. 판은 그 갈대들을 꺾어 울음소리처럼 불었습니다. 오늘날의 팬플루트와 팬파이프의 이름 앞에 그의 이름 판, 팬이 들어가게 된 슬픈 전설입니다. 자 팬파이프로 연주하는 (고독한 양치기) 들어보시죠.
# 7
이 멜로디 어딘가서 들어보신 것 같지 않나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 우마 서먼이 나오는 영화 (킬빌)입니다. 도살장의 칵테일 파티, 과장된 폭력의 미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영화 곳곳에 삽입된 이 곡은 피로 얼룩진 이 영화를 한층 기괴하게 만들고 있지요.
# 7
“레드 썬”이라는 주문이 들려도 깨지 않는 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여름날의 꿈에서 깨어나 작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배경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저희 집 앞 시냇가를 찍은 것입니다. 이 풍경과 함께 여름에게 작별을 고합시다. 저의 못난 시를 김솔 시인이 낭송해주시겠습니다.
# 8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최대봉의 낭만에 대하여 다음 방송을 기다려주십시오.
가을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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