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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봉의 문화읽기[199] 지난여름 2최대봉(작가)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9.05 17:02
  • 호수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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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청초

5년 전에 <지난여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해 여름은 세월호의 비극으로 기막히고 우울한 날들이었습니다. 니 편 내 편으로 갈라져 싸우느라고 온 나라가 세월 호와 함께 침몰하는 듯했습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들머리에서 다시 지난여름을 생각합니다.

지난여름도 그야말로 스트레스의 날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잠시나마 장밋빛 꿈을 꾸게 했던 남북화해의 기류는 동력을 잃어버린 듯하고 가뜩이나 어려워진 경제에 일본의 보복적 무역규제까지 겹치면서 나라는 더 시끄러워졌습니다. 똘똘 뭉쳐 위기를 타개해나가도 모자랄 판에 고질적인 분열과 증오로 온 나라가 들끓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이니 ‘반일종족주의’ 같은 해괴한 논리를 펴는 학자들과 아베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극우단체까지 출몰해 ‘친일파’를 뛰어넘어 ‘토착왜구’라는 섬뜩한 신조어까지 횡행하면서 우리 사회의 분열상이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조 아무개라는 이의 법무부장관 기용을 두고 그 분열상은 바야흐로 점입가경입니다. 내 편이 아니면 친일파고 내 편이 아니면 빨갱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조국 힘내세요’와 ‘조국 사퇴하세요’의 실시간 검색순위를 두고 마치 적의 고지에 태극기나 꽂은 것처럼 환호하고 좌절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는 아예 귀를 닫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과거의 쓰라렸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미래가 없습니다. 절대빈곤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낸 우리의 저력은 하나로 힘을 모았기에 발현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진영논리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려 할까요? 상대방의 영역을 인정해줄 때 내 영역이 오히려 넓어진다는 걸 믿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기만 할까요?

‘지난여름’이라는 말에는 해변의 이글거리던 태양뿐 아니라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 같은 게 있습니다. 잠시만이라도 짜증나는 현실에서 벗어나봅시다. 마술사가 소매에서 비둘기를 꺼내 듯 여름의 추억을 꺼내봅시다. 추억은 마법과 같은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지난여름이 늘 팍팍하고 따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신산(辛酸)한 세월이었지만 아름다웠던 유년의 기억은 늘 여름이 배경이었습니다. 우리의 아련한 여름의 기억 속에는 도시에서 온 얼굴이 말간 소녀가 있습니다.

여름 시냇가에서 그녀를 만나 늦여름 꽃을 묶어 수줍게 내밀고, 먼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비를 피해 수숫단 속으로 들어가고, 비에 젖은 소녀에게서 안개처럼 김이 피어올라 소년에게로 훅 끼쳐오고, 얼굴은 붉어지고 가슴은 쿵쾅거리고, 야속한 여름날의 짧은 소나기는 그만 그쳐버리고, 쏟아진 소나기에 물이 불은 개울을 업어서 건네주고, 소녀의 분홍 스웨터 앞자락에 소년의 등에서 옮겨온 검붉은 진흙물이 배어들고, 병약했던 그 소녀가 죽으면서 흙물이 밴 그 옷을 꼭 그대로 입혀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는, 중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황순원의 소설『소나기』이야깁니다.

고등학교 국어책에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이 있었습니다. 뤼브롱 산꼭대기에서 양들과 함께 생활하는 소년은 몇날 며칠을 사람 구경조차 못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던 어느 날, 보름치 식량을 실은 나귀 방울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인근 동네에서 제일 예뻤던 주인집 스테파네트 아가씨였습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불어난 도랑물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 그녀가 그 산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아래에서 소녀는 “양치기야, 너는 무슨 꿈을 꾸면서 잠이 드니?”라고 묻고, 소년은 ‘아가씨 생각, 아가씨 꿈을 꾼답니다.’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여름밤은 짧답니다, 아가씨. 금방 아침이 돼요.”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소녀는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소년의 어께에 기대 잠이 들고 소년은 생각합니다. 수많은 별들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께에 기대어 잠들어 있노라고.

“레드 썬”이라는 주문이 들려도 깨지 않는 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의 낮은 사색하기에는 너무 뜨겁고 여름밤은 꿈꾸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여러분의 지난여름은 어떠셨습니까?

우리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주인공 이민정이 옛날을 추억하는 장면에 흐르던 그리스의 국민가수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Aspri mera ke ya mas)>입니다. ‘소금처럼 짠 눈물로 시간을 적시게 될 거야/ 우리 그 쓰디쓴 여름날들을 함께 했었지/ 슬퍼하지 마/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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