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62] 풍기읍 성내3리

1907년 미국 선교회 선교사, 풍기지역 복음 전파
풍기직물 발상지 성내3리, 황무지 개척 공장설립

성내3리 전경
성내3리 박샘마을

풍기읍 성내3리 위치
성내3리는 풍기 초입 남원교 건너 우측으로 보이는 성내교회와 읍사무소 주변 마을이다.

이곳은 풍기 근대사의 시초가 된 성내교회가 자리 잡았고, 풍기직물산업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달 28일 성내3리에 갔다. 이날 풍기읍사무소에서 원종철 읍장, 윤동환 부읍장을 만나 풍기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 대광직물, 성내교회, 박샘마을을 탐방하면서 풍기의 근대사를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성내3리
풍기는 통일신라 때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태종 13년(1413) 기천현(基川縣)이 됐다가 1450년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됐다. 

세조 3년(1457년) 정축지변(금성대군변란)으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폐부되자 순흥부(府)를 관할했으나 숙종 9년(1683년) 순흥부가 회복되어 되돌려 줬다. 17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동부면(東部面) 성내리(城內里)가 됐다.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성내3리, 1973년 풍기읍으로 승격, 1980년 영풍군 풍기읍 성내3리, 1995년 영주시 풍기읍 성내3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우리고장의 지명은 임금의 태(胎)와 관련이 있다. 순흥은 고려 말 임금의 태를 순흥땅에 연이어 묻으면서 흥녕현령(興寧縣令,면급)-지흥주사(知興州事,군급)-순흥부(順興府,시급)로 승격됐다. 풍기도 그렇다.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의 태를 은풍현(예천) 명봉산에 묻은 후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보상으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豊基)라 하고 군(郡)으로 승격했다.

풍기는 기목진(基木鎭)-기주(基州)-기천(基川)-풍기(豊基)로 개칭됐다. 오랜 역사 속에서 터 기(基)자가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없다는 게 특이하다. 이를 두고 풍기 사람들은 “사람 살기 좋은 터(基)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풍기의 지명은 읍성과 관련이 많다. 읍성을 기준으로 성내리, 동문리, 서문리, 북문리 등이 있다. 성내리(城內里)는 동부면에 속했으며, 성 안에 있다하여 성내리라 했다.

풍기 첫번째 교회(서부리)
성내교회 현재모습
성내교회 박물관

풍기 근대사와 성내교회
지난달 28일 성내교회 정효진(65) 장로의 안내로 교회와 박물관을 둘러봤다.

정 장로는 “2004년 11월 교회역사를 보존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역사박물관을 개관하게 됐다”며 “이 박물관은 교회사뿐만 아니라 풍기 근대사의 중요한 기록들”이라고 말했다. 박물관 연혁에 보면 「190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 안대선(당시 새문안교회) 장로 등이 풍기지역 복음 전파에 나섰다. 이 때 동부동 김기풍, 김창립 씨 등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풍기 교회의 뿌리이다. 1909년 김용휘, 김창립 씨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부동에 초가(15간)를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풍기교회라 칭했다. 그 후 교회가 날로 부흥하여 1914년 현 위치에 예배당을 신축하게 됐다」고 적었다.

성내교회 최효열 담임 목사는 “우리교회는 112년 역사 속에서 민족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했고, 민족이 고난을 겪을 때 함께 아픔을 느꼈다”며 “최갑도 원로목사님을 비롯한 역대 훌륭하신 목사님들의 목회를 통해 오늘의 성내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인견산업의 발상지
풍기직물은 이북 평남 덕천지방에서 명주공장을 운영하다가 1934년경 월남한 사람들이 1938년 동부동에 40평 정도의 공장 2동을 신축하여 수족기 32대, 족답기 8대로 직조를 시작한 것이 풍기인견의 효시(嚆矢)가 됐다. 성내3리에서 나고 자란 원경옥(72) 씨는 “성내3리는 인견산업의 발상지”라며 “부친(故 원경중)께서는 원래 평양시 기림리에 사셨는데 정감록을 믿고 해방 직후(1946) 풍기로 이주하여 성내3리에 정착하셨다. 당시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미리 온 사람들과 연합하여 직물조합을 설립했다. 뽕밭황무지를 개척하여 공장을 짓고, 가내수공업 중심 소규모 산업에서 공장형 인견산업으로 전환하게 됐다. 그 후 인견인들의 끊임없는 연구노력으로 인견 산업이 꽃을 피우게 됐다”고 말했다.

1970년대 대광직물

성내3리 대광직물
성내3리를 탐방하다 70년대 골목길에서 ‘대광직물’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진흙 속 진주’라더니 그 격이다. 매장 벽에 대광직물 창시자 윤정대(91) 선생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윤 선생은 황해도 장연군 개암포에서 태어나 평양농업중학교를 다녔다. 해방이 됐으나 고향은 공산치하가 됐다. 거기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 배와 기차를 갈아타고 십승지지의 으뜸인 풍기 금계촌 용천동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인견기술을 배워 족답기로 인견을 짜기 시작한 것이 대광직물의 뿌리다. 매장 안 데스크에서 윤 선생의 며느리 허영란(54) 대표를 만났다. 허 대표는 “시부모님께서 1947년 족답기로 직조를 시작하셨다”며 “1978년 광폭(철제) 자카드직기 도입으로 우수한 원단 개발에 진입했고, 2010년 파리 박람회 출품, 2015년 국제박람회 참가 등으로 세계적인 상품으로 인정받았다. 대광의 창업 이념은 신독(愼獨)이다. 올곧은 맘으로 정직과 신용을 중시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윤 대표는 TV방송에도 여러 번 출연하여 풍기인견을 홍보하는 등 풍기인견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대광직물에서 나와 윤정대 선생을 찾아갔다. 성내2리 마을회관에서 윤 선생과 정인화(94,풍기직물)·김진재(93,대평직물) 어르신을 만나 풍기직물 1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풍기읍사무소

명품 청사 풍기읍사무소
500년 풍기 관아(官衙)의 역사는 근대사로 이어져 1914년 풍기면사무소, 1973년 풍기읍사무소, 1980년 영풍군청 등으로 이어오다가 2012년 성내3리 새청사로 이전했다. 이 청사(廳舍)는 2012 대한민국공공디자인 우수상, 2013 한국농촌건축대전 대상(大賞)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종철 읍장은 “본 청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란 주제로 디자인한 작품”이라며 “2층 전망대에 올라서보면, 주변 환경(소백산, 남원천)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지역 주민 중 일부는 읍 청사에 대해 “풍기의 역사성에 비해 실망이 크다”며 “천년고도 경북의 위용을 상징한 경북도청사를 보면서 (풍기읍청사는)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1939년 제운루 모습
제운루 복원공사 현장

제운루 복원 공사
윤동환 부읍장과 읍 청사 옥상에 올라 주변 경관을 조망하다 제운루(齊雲樓) 복원공사 현장을 확인했다. 제운루 복원은 풍기사람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윤 부읍장은 “제운루는 옛 풍기군 관아(官衙)의 문루(門樓)로 풍기초 교문 옆에 있던 것을 일제 때 보평대(保平坮)로 이건했으나 관리부실로 장마 때 무너진 것을 60년 만에 복원하게 됐다”며 “지난 2월 시공하여 금년 말 완공 예정이다. 누각에 걸려 있던 제운루·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衙門) 현판은 읍사무소 2층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제운루는 1936년까지 풍기초 교문 옆에 있었으나 학교 교육활동에 불편하다하여 1938년 공원산 보평대로 옮겼는데 1958년 무너졌다고 한다.

제운루는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지어진 건물이라고 알려진 2층 누각이다. 옛 풍기 선비들이 이 누각에 올라 산천을 조망하며 시를 읊은 시문이 여럿 있다고 한다.

성내3리 할머니방

도심 속 박샘마을
풍기읍사무소에서 남원교 방향으로 100m쯤 가다보면 도로보다 약간 낮은 지대에 도심 속 옛 마을이 있다. 좁은 골목길 안쪽에는 박샘이 있고, 마을 가운데에는 할머니방(성내3리회관)이 있다. 박샘에서 나물을 씻고 있는 진주강씨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옛날부터 청량한 물이 사시장철 솟아올라 지금도 자주 이용한다”고 말했다. 샘에서 나오는 길에 만난 박태숙(72) 씨는 “옛적부터 박샘이 있어 박샘마을이라 부른다”고 했다.

골목 안쪽에 있는 할머니방으로 갔다. 황연화·원경옥·신순희·권영화·홍순남·안금자 씨를 만났다. 황연화(82) 할머니는 “성내3리노인정이 풍기에서 제일 낡고 후지다”며 “마을 사람들은 현대식 노인회관이 속히 건립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안금자(80) 할머니는 “예전에 경봉아파트 뒤쪽에 연못이 있었고, 연못 안 섬에는 정자도 있었다”며 “못 둘레에는 부들이 무성했고, 연꽃이 만발할 때는 처녀총각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정대 대광직물 창시자
김진재 어르신
정인화 어르신
원종철 풍기읍장
윤동환 부읍장
원경옥 씨
정효진 장로
허영란 대광직물 대표
박태숙 씨
진주강씨 할머니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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