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60] 풍기읍 동부6리 미곡시장

669년 욱금동에 창건한 영전사, 1949년 이곳 이전
1972년 대한노인회풍기지부가 처음 이곳에 세워짐

동부6리 전경

동부6리의 위치
동부6리는 원래 동부2리 구역이었으나 시장지역 인구증가에 따라 1970년 6리로 분동됐다.
풍기 십자거리에서 순흥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오거리로타리에서 순흥통로로 가는 길 동편에 있는 마을이 동부6리이다. 동부6리에는 미곡시장, 영전사, 백운정경로당이 있다.
지난 11일 동부6리에 갔다. 이날 영전사에서 해득 스님을 만나고, 백운정경로당에서 권오하 노인회장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동부6리
풍기는 통일신라 때 기목진(基木鎭), 고려 때는 기주(基州), 태종 13년(1413) 경상도 기천현(基川縣)이 됐다. ‘풍기’를 ‘풍기’라고 부르게 된 것은 1414년 세종대왕의 아들 이향(李珦, 나중에 문종)의 태(胎)를 은풍현(현 예천) 명봉산에 묻음으로써 비롯됐다. 1450년 세자 이향이 즉위(문종)하자 그 보상으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시키고 은풍현을 풍기군에 속하게 했다. 동부리 지역은 17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읍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부면(東部面)이라 하고, 동문 밖에 있다 하여 동문리(東門里)라 칭했다. 1914년 일제(日帝) 때 영주군(榮州郡) 풍기면 동부2리에 속했다가 1970년 동부2리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동부6리로 분리됐다. 

1973년 풍기읍 동부6리, 1980년 영풍군 풍기읍 동부6리, 1995년 통합영주시 풍기읍 동부6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기 미곡시장

풍기 미곡(米穀) 시장
임진왜란 때 풍기읍성을 쌓았다는 구전이 있기는 하나 해동지도(海東地圖,1750)에서 읍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내(城內), 동문(東門), 서문(西門) 등 성(城) 관련 지명이 남아 있어 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예전에 읍성 동문 밖에 있었다는 저자거리가 바로 ‘미곡시장 자리’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고장에 5일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다. 1914년 순흥장이 처음 열리고, 1919년 풍기장에 이어 영주장, 부석장 순으로 장이 서기 시작했다. 박희순(87) 어르신은 “예전에 풍기초등학교 앞에 곡식, 광주리 등을 파는 장이 서다가 나중에 미곡시장 자리로 옮겼다”며 “당시 산촌 사람들이 곡식, 산나물, 약초 등을 가지고 와서 물물교환 방식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 후 등짐, 봇짐장사꾼들이 비누, 성냥 등을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장이 크게 번성했다”고 말했다. 김사진(87) 어르신은 “미곡시장을 중심으로 나무전, 옹기전, 닭전, 옷전, 포목전 등으로 늘어났고, 해방 후 우(牛)시장이 열리면서 소백산 산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구름밭’이란 지명이 생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금 풍기 5일장은 역 앞에서 번개처럼 반짝 왔다 간다.

영전사 해득스님

영전사 해득 스님
영전사에 가면 참으로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스님이 계신다. 해득(海得) 스님이다.

지난 11일 오후 2시경 영전사에 갔다. 스님의 반가운 영접에 차향과 함께하면서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해득 스님은 “영전사는 신라 문무왕 9년(669) 의상 대사께서 창건하셨다고 사적기에 나온다. 의상께서는 삼천도(三千徒)로 비유된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지통(智通), 진정(眞定) 등 십대 제자가 유명하다”면서 삼국유사 효선(孝善)편에 나오는 진정의 효행기를 들려주셨다. 영전사는 원래 욱금동(삼가호 서편) 영전마을 뒤쪽 소백산 줄기에 자리 잡은 대가람(大伽藍)이었으나 조선 중엽 폐사됐다고 한다.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23년 11월 28일 사지(寺址)에서 약사여래석불 출토를 계기로 해운선사(海雲禪師)에 의해 중창됐다. 그러나 6.25 전 소백산 일대 빨갱이들의 출현으로 군(軍)이 소개령을 내려 1949년 9월 15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영전사 신도이신 송필현(85,전 예천교육장) 선생은 “해득 스님을 잘 안다”며 “1980년 주지스님으로 부임하여 1993년 지역 최초 불교어린이집을 건립했다. 또 흩어진 불교 유적을 모으고 보존 관리하는 일에서부터 불교사 연구, 포교활동, 노인복지 등 어느 분야에도 소홀함 없이 정성을 다하신다”고 말했다.

1925년 발굴 당시 석불
1952년 전쟁 중 석불
2019년 석불

약사여래석불 출토 이야기
영전사에는 2001년 8월 20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24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입상 1위(位)가 모셔져 있다. 해득 스님은 “욱금리 영전마을 석불출토지점에 가서 파손된 광배의 파편을 찾아보기도 하고, 석불에 입힌 흰색 칠을 지워보기도 했다”면서 석불 출토 당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계해(癸亥) 11월 28일(1923) 밤 영전마을 거주 황영석(黃永奭)씨 부인 김금강화(金金剛華,당시 45세)씨 꿈에 노승이 나타나 ‘소승은 수백 년 지중에 묻혀 광명을 못 본지 오래됐다. 원컨대 나로 하여금 세상으로 나가게 할진데 부인의 원(願)을 성취케 하리라’고 했다. 괴이하게만 여기고 있었더니, 다시 갑자(甲子,1924) 3월 13일 밤 꿈에 한 젊은 스님이 말하기를 ‘전일 노승의 부탁을 못들은 척하는 것은 무슨 연고요?’하니 부인이 ‘대사는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이 ‘마을 뒤 밤나무 밑에 있으니 속히 출세케 해 주시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에 남편은 동네 사람들과 밤나무 밑을 파보니 과연 큰 석불이 출토되어 깨끗한 자리에 봉안하게 됐다. 이 석불이 현재 영전사 대웅전 주불”이라고 말했다.

풍기 경로당의 원조(元祖)
권오하 백운정경로회 회장은 “우리 백운정경로회(白雲亭敬老會)가 풍기 경로회의 뿌리”라며 “1972년 이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짓고 대한노인회 풍기지부로 출범했다고 하니 47년 전”이라고 말했다. 경로당 책장에 풍기경로회 역사를 적은 책과 2019년 권오하 회장이 받은 표창패가 있다. 역사책에 「백운정경로회는 풍기경로회의 원조(元祖)다. 郡분회 초대 회장 최우규, 백운정경로회 초대 회장 정진우, 2대 권수호, 3대 전재성, 4대 박승태, 5대 정진홍, 6대 이상호, 7대 전만식, 8대 박성복, 9대 권오하」라고 기록했다.

송갑용 청년의 1.4후퇴기
진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송갑용(86) 어르신은 6.25 때 16세 청년이었다. 그해 겨울 고향마을이 중공군 손아귀에 들어가자 진남포로 피난 갔다가 1.4후퇴 때 이불보따리 하나만 짊어지고 일행 15명과 남으로 남으로 서울까지 걸었다. 송 어르신은 “돈 한 푼 없었으니 거지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기차 지붕위에 올라 부산으로 갔다.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을 때 풍기 사는 3종형을 만나 풍기로 오게 됐다. 18살 때 풍기 와서 직조공장에서 일했고, 23살 때 봉화 색시를 만나 결혼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송 어르신은 “지금까지도 고향소식을 전혀 모르고 산다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백운정경로당 사람들
황유업,김일훈,송갑용 어르신
하창구,이진호,정경채,홍헌식 어르신
백운정경로당
김계원 장군 생가

백운정경로당 사람들
박노현(84) 부회장은 “우리 경로회는 풍기지역 남성들로만 구성됐다”며 “오랜 세월 풍기에 살면서 풍기를 아끼고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했다. 박헌구(86) 어르신은 “백운회가 잘 돌아가는 것은 회원 모두 서로 존중하고, 솔선수범하기 때문”이라며 “권오하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회원들이 경로당을 내 집같이 아끼고 보살핀다”고 했다. 권오상(82) 총무는 “우리 경로회는 달(月)마다 (유치원 아이들처럼) 생일잔치를 하면서 친교를 다진다”며 “또 1년에 2-3회 관광 가는 것도 우리 백운회의 자랑”이라고 했다. 지금도 청년으로 산다는 박병준(86) 어르신은 “이 나이에 자전거타고 전국을 종주했다”면서 “평소 자전거 타고 죽령 갔다 오는 게(혹서기 제외) 일상”이라고 말했다. 일생 인삼전문인으로 살았다는 김일훈(81) 어르신은 “박정희 대통령 때로 기억된다. 인삼 300칸 농사지었더니 돈이 포대로 들어왔다. 당시 1년 인삼농사지어 논 7마지기 샀으니 노다지 캐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병구(83) 어르신은 “영전사 정문 좌측에 김계원(육군참모총장) 장군 생가(生家)가 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만 장군의 부친 故 김길준 장로님이 평생 살던 집”이라고 말했다. 장구식(86) 어르신은 “송지향 선생의 향토지에 보면 ‘동문 밖에 시전(저자 시市, 가게 전廛)이 있었다고 적었다”며 “선대 어르신들께서 ‘미곡시장 입구쯤에 동문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바쁘신 가운데에도 취재에 협조해 주시고 도움말씀 주신 이승길, 황유업, 하창구, 이진호, 정경채, 홍헌식 어르신께 감사드린다.

권오하 노인회장
박노현 부회장
이승길 총무
권오상 총무
박희순 어르신
김사진 어르신
박헌구 어르신
장구식 어르신
박병준 어르신
김병구 어르신

 

이원식 시민기자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