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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봉의 문화읽기[195] 아리랑 아라리요최대봉(작가)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8.08 11:19
  • 호수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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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성초

지난 주말 한 방송사에서 3.1운동 100주년기념 다큐 『아리랑 로드』를 방영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명령으로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으로 쫓겨난 고려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풍파의 삶과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들이 몸으로 기억해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부르는 <아리랑>을 그린 영상물이었다.

1930년대 연해주(블라디보스톡)에는 20만 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을 피해 먼 이국땅까지 쫓겨 온 사람들이었다. 1937년 8월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우스리스크 역으로 집결했다. 그렇게 17만 명의 우리 동포들이 시베리아횡단열차의 화물칸에 짐짝처럼 던져져 6500km나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동토(凍土)에 벼려졌다. 그로부터 9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의 후손들에게 남아 있는 조국의 흔적은 그들이 몸으로 체득해 부르는 노래 <아리랑> 뿐이었다.

1896년 최초로 <아리랑>을 채보(採譜)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말이다. “<아리랑>은 즉흥곡의 명수인 조선인들이 쌀처럼 귀히 여기는 노래다. 아무도 그 정확한 편수를 알지 못한다.” 아리랑 사설(辭說)은 8000수가 넘는다고 한다. 그렇게 곡절 많은 사연을 지닌 노래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아리랑>은 어떻게 우리 민족의 노래가 되었을까? 누가, 언제부터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부턴가 지역마다 다른 아리랑들이 존재해왔지만 전국적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전후로 짐작될 뿐이다. 7년 간 지속된 그 토목공사는 전국의 민중들이 집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강제로 끌려온 조선팔도의 부역꾼들을 달래기 위해 대원군은 매일 밤 장끼자랑을 열었다.

‘전국노래자랑’에도 초대가수가 있듯이 전문소리꾼들도 거들었다. 산과 강으로 나누어졌던 팔도 노래의 교류와 궁중예술과 민중예술의 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라리> 등 곳곳의 아리랑을 세련된 형식으로 만든 전문소리꾼들과 공사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 아리랑은 조선팔도의 모든 민중들에게 스며들었다.

‘아리랑 아리랑 어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흔히 부르는 아리랑은 비교적 그 지은이와 불리기 시작한 시기가 명확하다. 1926년 10월 1일. 종로의 단성사 앞은 기마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24살의 배우이자 감독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을 보기 위해서였다. 주인공 영진 역은 나운규였고 여동생 영희는 기생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신일선이 맡았다.

3.1운동 이후 실성한 청년 영진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마을 악덕지주의 청지기인 기호가 자신의 누이 영희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를 낫으로 죽이고 순사들에게 잡힌다. 포승줄에 묶여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떠나보내며 흰 옷을 입은 마을사람들이 노래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소학교 상급반이던 나운규는 청진-회령 간 철도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부르는 구슬픈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도 한참이나 서서 듣곤 했던 ‘아리랑 아리랑~’ 그 가락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 영화에 넣었고 그 노래가 오늘날 우리가 널리 부르는 아리랑이 된 것이다. 그 아리랑을 <본조(本調) 아리랑>이라고도 하는데 ‘오리지널’이라는 본조가 아니라 그 이전의 아리랑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일 뿐이었다.

‘문전옥답은 다 어디 가고/ 쪽박의 신세가 웬 말이냐’라는 영화 속 아리랑의 가사는 일제의 수탈을 풍자하고, ‘내 눈이 어두워 못 본다면/ 개천을 나무래 무엇 하리’는 민족의 각성을 부추긴다고 하여 일제가 극장에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르지 못하게 하기도 했지만 필름과 영사기를 실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변사들에 의해 그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과 국가로서가 아니라 우리 동포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비극의 총량을 계산한다면 일본인들의 땅덩어리를 다 팔아도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북간도로,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떠나야 했고 군함도의 탄광으로 남양군도의 전선으로 끌려가 고난과 역경의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동포들에게 <아리랑>은 남 들으라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노래였다. 반성할 줄도 모르고 다시 또 우리에게 치욕을 안기려 하는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아리랑>에는 어떤 음표를 그려 넣어야 할까?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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