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3, 전 영주문화원 이사)

부석사(浮石寺)는 의상(義湘)이 창건을 할 때부터 부석(浮石)과 석룡(石龍)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부석과 석룡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구전으로만 전해 왔다. 따라서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시민들도 많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자.

 

1. 부석(浮石)

무량수전(無量壽殿) 서편 바위떨기 위에 얹혀있는 <부석(浮石)>은 반석(盤石)형(形)으로 약 30여명이 둘러앉을 만큼 넓고 크다.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이 자리에 화엄도량(華嚴道場)을 세우려고 할 때,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소승잡배(小乘雜輩)들이 끝까지 터를 비워주지 않고 방해를 하므로 선묘룡(善妙龍)이 조화를 부려 반석(盤石)을 공중에 둥실 띄워 땅으로 떨어질듯, 말듯하게 하여 7일간이나 반석을 이리저리 돌리니 잡배들은 이를 보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이 반석은 바위떨기위에 얹혀 있지만, 반석 밑으로 명주실을 넣어 양쪽 끝을 마주잡고 끌고 나오면 명주실이 걸리지 않고 빠져 나온다고 하여 <뜬 돌> 즉 부석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소승잡배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반석이 공중에서 7일간이나 맴돌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절을 부석사라 불렀고, 의상조사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였으며, 화엄종(華嚴宗)을 부석종(浮石宗)으로 일컫게 되었음은 모두 반석으로 인해서이다.

반석은 부석사의 상징물이다.

 

2. 석룡(石龍)

선묘룡(善妙龍)이라고도 부른다. 선묘(善妙)는 의상이 당나라에서 공부를 할 때, 양주성에 있는 어느 신도의 집에서 잠시 머물렀을 때, 집주인의 딸이었다. 선묘는 의상을 깊이 사모하여 의상이 귀국할 때 바다에 몸을 던져 룡(龍)으로 변해서 의상을 모시고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다. 이후 선묘는 비록 용이 되었지만, 의상이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서 도왔다.

부석사를 창건할 때 소승잡배들을 신술(神術)로 몰아낼 때도 선묘의 도움이었다. 선묘는 절이 완성되자, 스님의 법(法)을 받들고, 도량(道場)을 길이 수호(守護)하고자 석룡으로 변해서 무량수전 뜰아래 묻혀있다고 한다.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다.

선묘는 죽어서까지 의상을 위하는 깊은 마음이었다. 분명히 무량수전 본존의 대좌 밑에 머리를 두고 굽이를 틀어서 꼬리는 석등 밑에 묻혔다고 했다. 1916년 무량수전을 보수할 때, 일본인들이 사실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파 뒤졌던바, 석룡이 있음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1967년 1월 8일자 한국일보 기사에는 <6일 아침부터 석룡(石龍) 발굴 작업을 시작한 조사단(신라오악조사단)은 무량수전 앞 기단을 따라 일직선으로 시굴하던 중, 7일 하오 기단 서쪽에서 석룡이 발견되었다. 화강암으로 된 석룡은 등이 끊긴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내용이 있다.

석룡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 임란(壬亂)때, 명(明)나라 어느 장수가 칼로 석룡의 허리를 쳤다고 전한다. 부석사에는 이와 같이 숨겨진 보석 같은 이야기가 많다.

2018년 6월 30일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부석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영주인은 우리 문화유산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참고. 영주영풍향토지.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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