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56] 문수면 권선리 뒷골

8世 욱(煜)이 1470년경 곰실(호문)에서 뒷골로 이거
덕수장문 12남매의 우애, 한국 가족사에 남을 미담

뒷골 마을 전경
마을회관과 대지기증 표석

문수면 권선 뒷골 가는 길
권선 뒷골은 연화산(蓮花山)을 등지고 학가산(鶴駕山)을 바라본다. 시내 남산육교에서 문수방향으로 간다. 적서교를 건너 노벨리스코리아에서 좌회전하여 서천을 따라 2.5km가량 내려가면 권선리로 가는 표석이 나타난다. 우회전하여 문수농공단지를 지나면 Y자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측 길로 접어들면 연화산 남쪽자락에 자리 잡은 뒷골마을이 보인다. 지난 5일 뒷골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장효진 노인회장, 장세응 어르신, 최선기 할머니, 장세봉 씨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권선리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團練使)-순안(順安縣令)-영주(知榮州事)로 불렀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이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권선 뒷골 지역은 권선전리(權先田里) 전두전방(纏頭田坊)이라 부르다가 175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권선전면 전두전리가 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권선면 권선동이 됐다. 이 때 월호동(月呼)과 벌사동(伐賜)이 권선면에 속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권선동은 영주군 문수면 권선리로 개편됐다.

권선발 옛 마을 자리

권선 뒷골의 지명유래
권선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1625년에 편찬된 최초 영주지에 이곳 지명이 「권선전리(權先田里) 전두전방(纏頭田坊)」이라고 나온다. 현재 권선리에 사는 사람 누구도 권선(權先) 또는 권선전(權先田)의 유래를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지명유래 전문가에게 물어봤다. 그는 “권선전(權先田)에서 선전(先田)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밭’, 권선전은 ‘권씨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참고할 뿐이다. 예전에 Y자형 삼거리 우측에 ‘권선발(權先-)’이란 작은 마을이 있었다. 이 권선발을 기준으로 앞마을은 고랑골(皐蘭谷), 뒷마을은 뒷골(後谷)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또 현 문수농공단지 자리에 ‘누르실’이라는 마을이 있었다한다. 흙 색깔이 다른 곳보다 유달리 황색이어서 누를 황(黃)자 ‘누르실’이라 불렀다 한다.

덕수장씨 제단비

덕수장씨 입향내력
덕수장씨 시조 장순룡(張舜龍,1254-1297)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될 원나라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의 수행관으로 왔다가 귀화했다. 충렬왕 3년(1277) 장군에 오르면서 왕으로부터 ‘장순룡’이라는 성명과 덕수현(德水縣,개풍군)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음으로써 덕수장문(德水張門)이 시작됐다. 4세 우(羽,號:杜村)는 조선 개국 때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이다. 태조 5년(1396) 문과에 급제하여 의금부사, 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이조판서를 지냈다. 우(羽)의 3남 신지(信之,5世)의 아들 경손(敬孫,6世)이 1450년경 한양에서 영천 호문(곰실)으로 낙향하여 영주 입향조가 됐다. 경손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정4품)를 지냈고, 후에 한림공파 파조가 됐다. 경손의 아들 구정(九鼎,7世)은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선무랑통례원인의(宣務@通禮院引儀)를 지냈다. 구정의 둘째 아들 욱(煜,8世)이 곰실에서 뒷골로 살림을 나 덕수장문 후곡동 입향조가 됐다. 덕수장씨 세보에 보면 2세부터 8세까지 생몰 기록이 없어 정확한 입향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후곡 입향조 욱(煜)의 아버지 구정(九鼎)의 문과급제 년도가 1468년이므로 1430년생으로 추정해 볼 수 있고, 아들 욱(煜)의 생년은 1450년경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래서 욱(煜)이 장성하여 곰실에서 후곡으로 살림을 났다면 1470년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장효진(68) 뒷골 덕수장씨 주손은 “마을 앞산 제단비에 시조부터 18세 선조까지 내력이 새겨져 있다”며 “욱(煜) 선조께서 1470년경 곰실에서 뒷골로 이거 하셨다고 하니 덕수장문이 후곡에서 세거한지 549년 됐다”고 말했다.

제단비를 안내해 준 장세응(86) 어르신은 “이 제단비는 선조님들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2008년 3월 건립했다”며 “아우 세익이 숭조의 뜻을 두고 이 비를 세웠으며, 삼종제 세록이 비문을 썼다”고 했다.

권선뒷골 표석
12남매 고향 이야기
마을의 상징 느티나무

12남매 이야기
권선 뒷골 안쪽 산자락과 마주치는 곳에 덕수장문 12남매가 살던 집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 그리고 보릿고개를 넘을 때 태어난 12남매는 격동의 현대사를 체험한 세대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참 위대하셨다. 그 시대 우리 12남매를 낳으시고 대가족을 부양하면서도 학교를 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도 고향을 지키는 삼남 세봉(68) 씨는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다가 1년에 한 번씩 만난 지 어언 27년이 됐다”며 “매년 8월 마지막 토요일 12남매가 한명도 빠짐없이 뒷골에 모여 ‘1박 2일’ 역사를 쌓는다”고 말했다. 세봉 씨 부인 권용희(63) 씨는 “덕수장문의 12남매의 우애는 한국 가족사(家族史)에 기록될만한 사건이고 미담”이라며 “처음 생각에 ‘몇 해 하다가 그만두겠지?’ 했는데 28회를 맞이하게 됐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60여명이 북적였다”고 말했다.

마을 원로 장세응 어르신은 “12남매의 우애는 참으로 대단하다”며 “삼남 세봉은 마을회관을 지을 대지(77평)를 기부했고, 준공 시 남매들이 대형TV, 헬스기구 등을 기증했다. 또 차남 세일은 한국농어촌공사 이사로 있을 때 영주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권선뒷골’ 표석을 세우고, 느티나무 아래 정자도 지었다”고 말했다.

권선정(權先亭)
응석사 응석(凝石)

뒷골과 연화산 응석사
태소백을 흘러온 백두대간은 도솔봉에서 남동진하여 용암산에서 높이 솟았다가 다음으로 연화산(蓮花山,266m)에서 머리를 높이 들었다. 연화산 기슭에 자리한 응석사는 풍광이 족히 가람(迦藍)이 깃들만하고 여지승람에도 올라 있다. 소고 박승임이 이 절집에서 제자들과 학문의 모임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옛날에 상당한 규모의 도량(道場)이 있었지만 잦은 화재로 없어졌다. 1957년 홍순권(洪順權)이 절집을 다시 세웠다. 절집 뒤 산비탈에 층층으로 엇갈린 바위가 있는데 엉킨 바위에서 응석(凝石)이란 절 이름을 취했다고 하며, 이 바위 모양이 피어나는 연꽃봉오리 같다하여 ‘연화산’이라고 부른다.

장세일 씨(종묘대제참례)

출향인 장세일(71,한국농수산유통공사 이사) 씨는 전화통화에서 “연화산은 우리들의 큰 놀이터였다”며 “정상에 올라보면 연화산이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다. 장엄한 소백산맥과 거룩한 학가산을 바라보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진취적 기상을 꿈꿨다”고 말했다.

고향으로 귀농한 박춘학(58) 씨는 “연화산과 응석사는 뒷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며 “연화산에 소 풀어놓고 응석사 주변 과수원에서 ‘사과서리’하며 놀던 때가 그립다”고 했다.

뒷골 마을 사람들

뒷골마을 사람들
장효진(주손) 회장은 “덕수장문은 뒷골에 3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며 “근대에 와서 장우건 판사, 문수교회 설립자 장국현 장로, 장세진 문수면장, 장세국 교육행정 사무관, 장세일 한국유통공사 이사 등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뒷골에서 나고 자란 박춘래(63) 씨는 “느티나무 아래서 단오날은 그네를 뛰었고, 풋굿날은 한마당 풍악을 울렸다. 마을 사람들이 다모여 노래자랑를 하기도 했는데, 청년들이 놀다 한바탕 싸우기도 하던 곳”이라며 “늘 그리던 고향으로 남편(김용환,65)과 귀촌했는데 동생(박춘학·이연희 부부)네도 따라 오는 바람에 2집이 늘었다”고 말했다. 뒷골 언덕 위에 새집을 지은 류진수(67) 씨는 “어릴 적(10살) 추억이 많아 나이 60에 고향으로 귀촌하게 됐다”며 “예전에는 덕수장씨 집성촌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사는 새로운 권선 뒷골이 됐다”고 말했다.

옹천에서 뒷골 청풍김씨家로 시집왔다는 강방자(79) 할머니는 “정월보름날 자시(子時)에 시어머니께서 제수를 마련하여 느티나무에 고사(告祀) 지내는 것을 봤다”면서 “당시 청풍김씨 3가구가 살았는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예천 감천에서 가마타고 뒷골 밀양박씨家로 시집왔다는 최선기(86) 할머니는 “19살에 시집와 28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어렵고 힘들게 살 때 조카, 질녀들이 큰 힘이 됐다”면서 “남편의 선대 때부터 덕수장씨와는 친형제 같이 지냈다고 들었다. 회관 대지를 기증해 주신 장세봉 씨, 노인회를 잘 이끌어주신 장효진 회장님께 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기자가 덕수장씨 영주 입향 내력과 뒷골로 이거한 년대를 알고자 할 때 세보를 보여주면서 취재에 적극 협조해 주신 장학진 종친회장과 장세익 선생께 감사드린다.

강방자 할머니
장학진 종친회장
장세익 선생
장효진 노인회장
장세응 어르신
최선기 할머니
장세봉 씨
류진수 씨
김용환 씨
권용희 씨
박춘래 씨
박춘학 씨
이연희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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