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55] 순흥면 지동1리 ‘재배이’

주변 산세가 꽃방·꽃가리 같이 아름다워 재방(再芳)
정성진 법무장관·정승혜 판사 등 글로벌 인재 배출

재배이 마을 전경

순흥면 재배이 가는 길
순흥면 지동1리 재방마을은 순흥면 남쪽 북바우 서편에 있다. 영주 서천교사거리에서 순흥방향으로 간다. 동촌2리 조개섬 삼거리에서 순흥방향 1km 지점 북바우 산모롱이를 돌아 옛길로 접어든다. 300m쯤 가다보면 지동1리(재배·못골) 버스승강장이 나오고, 그 옆에 「청주정씨재방동세거지」라고 새긴 표석이 나타난다. 마을은 농로를 따라 500여m 안쪽에 있다.

지난달 27일 지동1리 재방마을에 갔다. 재방노인회관에서 박명서 노인회장, 정창순 전 노인회장, 권옥순 씨, 류분하 씨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속의 순흥 지동
순흥은 고구려 때 급벌산군(及伐山郡)이라 불렀고, 통일신라 때 급산군(급山郡)으로 고쳐 불렀다. 고려 때는 흥주(興州)-순정(順政)-순안(順安)으로 부르다가 고려 말 충렬왕 때 임금의 태(胎)를 순흥땅에 묻고 흥령현령(興령縣令), 충숙왕 때 또 태를 묻고 지흥주사(知興州事), 충목왕 때 또 다시 태를 묻고 순흥부(順興府)로 승격됐다. 조선초 1413년(태종13년) 전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재방마을 지역은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대평면(大平面)에 속했다. 당시 대평면에는 아신리(衙薪里), 성하리(城下里), 석교리(石橋里), 죽동리(竹東里) 등이 있었는데 ‘지동’이나 ‘재방’이란 행정구역은 없었다. 그 후 1547년 정축지변으로 폐부되어 풍기군에 붙었다가 1683년 순흥부로 회복됐다.

조선말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군 대평면 지동(池洞)이 됐다. 이 때 비로소 정식 행정구역 ‘지동’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순흥면 지동리, 1980년 영풍군 순흥면 지동1리, 1995년 통합 영주시 순흥면 지동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재방과 꽃가리 마을
청주정씨 선조 묘소

재방(再芳)과 꽃가리의 유래
옛날 재방동 청주정씨家의 마당쇠가 “나으리, 우리마실 이름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여쭈었다. 진사(進士)께서 말씀하기를 “이곳 산세가 보고 또 봐도 꽃방같이 아름다우니 두 재(再)자에 꽃다울 방(芳)자를 써 재방(再芳)이라 부르도록 하라”고 했다.

마당쇠가 마을사람들에게 “나으리께서 ‘재방’이라 부르라 하셨다”며 동네방네 다니면서 알렸다. 이 후 마을 사람들은 ‘재방’을 ‘재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재배이’로 부르다가 ‘재배이’로 굳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줄여서 ‘재배’로 쓰고 있다.

마을회관 서북쪽 골짝을 ‘꽃가리’라고 부른다. 아주 옛날 재방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 산에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마치 꽃으로 낟가리를 쌓은 듯 하다하여 ‘꽃가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조선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곳 선비들이 모여 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 지(池)자 지동(池洞)으로 정했다고 한다. 못골 역시 못(池)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고, 신재방은 재방마을 사람들이 골 밖으로 옮겨와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하여 신재방(新再芳)이라 부르게 됐다.

청주정씨 재방동 세거지

청주정씨 재방동 세거 내력
지동1리 초입에 ‘청주정씨 재방동 세거지’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재방동(再芳洞) 청주정씨는 시조 정극경(鄭克卿)의 7세손 설헌공(雪軒公,휘 오)의 후손이다. 설헌공은 고려조에 벼슬을 하여 청주에서 개성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조선이 개국하자 공의 아들 침(1323-1395,1343문과)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명분을 지켜 선친의 외가인 안동부 풍산현 회곡리로 내려왔다가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를 중심으로 경북북부 지역에 세거지(世居地)를 이뤘다.

청주정씨 대종회 분파도에 보면 「안동 입향조 침(8세)의 현손 원로(元老,12세,판서공)의 삼자(三子) 인(仁,13세)이 1450년경 안동 와룡에서 영주 재방으로 분가했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청주정씨가 재방에 세거한지 570여년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방문중 정원조(82,30세손) 어르신은 “저의 직계 9대조 광흡(光翕,23세,1758生,通德郎) 선조의 어머니이신 안동김씨 할머니께서 어린 광흡을 데리고 안동에서 재방으로 이거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며 “광흡 선조님이 1758년생이시니 선조님 입향 이후 재방에서 250년 세거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광흡 선조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이미 선대들이 세거해 온 것으로 추정 된다”고 말했다.

김창동 노인회총무는 “재방동 출신인물로는 청주정씨 29世 정성진(鄭城鎭,서울법대)은 2000년 국민대 총장, 2007년 법무부장관 역임, 정승혜(서울법대) 판사, 정기문(서울대서양학과) 연합통신 부장, 김준협(고대법대) 서울은행장, 이상호(서울공대) IBM 부사장, 권영순 전 몽고대사 등 굵직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말했다.

재방에서 신재방으로 이거
재방마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산속 꽃방에 살다가 들판으로 나온 것은 1989년부터라고 한다.

김창동(70) 총무는 “어릴 적 재방마을에 37호가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살았다”며 “저의 선친께서 1969년 신재방으로 이거한 것이 최초고, 그 뒤 1989년부터 2000년까지 대부분 신재방쪽으로 옮겨왔다”고 말했다.

정창순 선생의 부인 박승분(74) 씨는 “예전에 재방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 지동평야에서 농사 지을 때 수많은 볏단을 지게로 지고 재방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겠냐”며 “1970년대 후반 새마을운동 때 재(고개)도 낮추고 길도 넓혔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정창순 초군농악 상쇠

초군농악 정창순(상쇠) 선생
순흥면 지동리 신재방마을에 초군농악 정창순(상쇠) 선생이 사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악보가 없던 당시 12가락을 외워서 연주했다는 것만으로 ‘보통 머리가 아니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문수 만방 우무실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재방에 살았다는 정 선생은 “당시 재방에 남도굿거리장단을 잘 치시는 김정수(의성인) 어르신이 계셨는데 그분이 하시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배우게 된 것 같다”면서 “해방 후 마을마다 농악대가 조직되어 억압의 한을 풀었다. 그 때 풋굿 뒷날 면민이 모여 풀베기를 할 때 각 마을 농악대가 배점학교에서 만나 크게 농악한마당을 펼쳤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10여 년간 각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93년 소백풍물단을 이끌고 경북풍물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2002년 제주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강춘자, 황금순, 박금순 씨
재방경로당과 재방정(再芳亭)
김기숙, 전영하, 정인순 씨
순흥복숭아

재배이 마을 사람들
마을 앞 넓은 들은 경지정리가 잘 돼 바둑판을 보는 듯 반듯하다. 예전에 사람 살기 좋기로는 남순(南順) 북송(北宋)이라 하여 순흥을 남한에서 으뜸으로 꼽았던 것은 넓은 대평평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명서(72) 노인회장은 “우리 마을은 넓은 들이 있어 풍요롭고, 꽃가리 같은 산이 있어 더욱 살기 좋은 마을”이라며 “현재 신재방에 14집, 재방에 6집, 못골에 9집 등 37가구가 사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15년 전 살기 좋은 농촌을 찾아왔다는 신태현(75)·박금순(70) 부부는 “우리집 거실 벽에 걸린 7남매(아들1,딸6) 사진을 보고 모두 부러워한다”며 “키울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딸이 많아 행복하다”고 말했다. 2003년 경기 화성에서 풍요로운 농촌마을을 찾아왔다는 전문수(74) 씨는 “넓은 들과 복숭아밭을 보고 재방마을로 귀농하게 됐다”며 “살기 좋고 인심 좋은 마을에 정착하게 되어 행운”이라고 말했다.

꽃가리 복숭아농장 이영걸(72) 씨는 “10여 년 전 지동으로 귀농하여 상꽃가리에 터 잡았다”며 “탐스러운 복숭아를 수확하는 재미에 귀농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동촌 피끝에서 가마타고 재방으로 시집왔다는 박경남(76) 씨는 “우리 마을은 예로부터 예의 바르고 인심 좋은 마을”이라며 “명절 때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차례를 지냈고, 단오나 풋굿 때는 양편으로 갈라 씨름을 하고 농악놀이도 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마을에 갔을 때 지리를 안내해 주셨던 전영하(71) 씨는 “재방경로당이 마을 중앙 명당 터에 자리 잡아 활용이 잘 되고 있다”며 “경로당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이끌어 수신 박명서 회장님과 김창동 총무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꽃가리 마을 구경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이도선(63,우계인) 씨를 만났다.

꽃가리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거실에 들어가 진한 오디차 한 잔을 받았다. 얼마나 달던지 지금도 생각난다.

이원식 시민기자

박명서 노인회장
정원조 어르신
정청순 전 노인회장
김창동 노인회총무
박경남 씨
신태현 씨
전문수 씨
박승분 씨
권옥순 씨
전영하 씨
이영걸 씨
류분하 씨
이도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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