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수 지회장(사진 오른쪽)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매일신문이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2019 매일보훈대상’ 시상식이 지난 19일 오후 3시 매일신문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전몰군경유족회 영주지회 권영수 지회장(72·영주시 웃무리로)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올해 매일보훈대상을 수상했다. 6·25전쟁으로 부친을 여읜 권 지회장은 성인이 되기 전 모친마저 작고하는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녀 5명을 훌륭히 성장시켰다. 2006년부터는 전몰군경유족회 영주시지회장과 6·25유자녀회 중앙이사를 지내며 불우회원돕기 모금운동, 보훈시설물 개선활동, 민관 합동 조기 참배 등으로 보훈 가족의 위상을 정립하고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위로와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70여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마음이 이렇게 울컥해집니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지났으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에게 이제는 편안한 영면을 기원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심려를 끼치는 것을 보면 역시 혈육 때문인가 봐요. 그리고 제가 무슨 보훈대상 수상 자격이 있습니까? 다만 아버지가 조국을 위해 산화(散華) 하셨고 또 우리지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주위 분들의 성원 덕분으로 생각합니다”

# 아버지 군 생활을 정리한다면?
“1950년 9월 아버지가 29살 되던 해 군에 입대하셨고 당시 제 나이가 두 살이었으니 무엇을 알겠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입대해 2사단 32연대에 배속받아 근무하면서 총알이 비 오듯 치열했던 포천지구 전투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그때 부상으로 제대하신 친구 분의 말을 어머님이 듣고 제가 성장 할 때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참고로 그 후 전투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21일 서울을 탈환했고 10월 초 북진을 계속 할 때 후방에서 차단돼 잔류된 북한 정규군과 동일한 많은 잔당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2사단 32연대가 투입됐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작전에서 아버지가 용전분투하시다가 입대하신지 한 달 만에 전사하신 것으로 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권 지회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 권 지회장님이 살아오신 과정은?
“저는 1948년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전사통고 받았을 때 저는 두 살, 어머님은 그때부터 청상과부가 되셨으니 집안은 아마 한숨과 눈물의 세월이었을 것이고 원래 넉넉지 못했던 가정형편은 더욱 난관에 봉착했을 것입니다. 오직 어린 아들 하나 옳게 키워 보겠다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수모도 많이 받으셨던 어머님입니다.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다행히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 마칠 수 있었지요. 그렇게 보살펴 주신 덕택에 저는 철도청에 입사할 수 있었고 제 나이 25세 때 아버지가 가신 23년 만에, 청천벽력같이 어머니마저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의 저주인 듯 이런 비운도 있을까하며 너무 암담해 할 말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아픔을 보내고 저는 1남 4녀를 두게 됐고 마침 아이들 터울이 좋아 학자금을 받아 학교를 다 시켜놓으니 장남은 현재 건설사 대표로 일하고 모두 자기 몫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항상 감사히 생각합니다. 또한 직장 생활 37년 만에 명예로운 정년퇴직으로 물러날 수 있었던 것도 두 분의 음덕이시겠지요” 그제야 밝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운다. 이렇게 살아 온 권 지회장은 공직에서 간부직으로 근무하면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철도청창표장과 옥조근정훈장을 받았고, 사회에서도 보훈처장, 전몰군경유족회장, 경북지사의 표창을 받을 만큼 믿음과 신뢰성이 있는 분이라는 평이다.

# 전몰군경유족회 회장직은 어떻게 맡았나?
“2005년 정년퇴직으로 홀가분하게 살아가려 했지만 2006년도에 회장직을 넘겨받았습니다. 영주지회에는 오래전부터 자주 찾아와 어려운 일들 의논하고 상부상조해 왔지만 중책을 맡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일 한지도 벌써 13년이네요. 회원들은 내 가족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모두 가슴 속에 한 많은 응어리가 쌓여있어 서로가 아니면 도저히 풀어 낼 수가 없어요. 이제는 노인들이 많으시고 2, 3세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와 관계내용을 잘 몰라 당황할 때 해결해주면 좋아하는 그 모습에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어요. 지회장이 됐다고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회원 시절과 똑 같이 지내면서 지회 일을 처리할 때 회원들의 의사를 종합해 최선책을 선택하는 것 뿐입니다. 회원의 수는 2006년도는 210여 명이었는데 현재는 250여명으로 좀 늘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전물유가족 2, 3세들이 애국애족을 위해 순국에 참 뜻과 위대한 정신에 대해 점차 희석되는 감을 느껴 이를 상기코자 2014년부터 영주충혼탑에서 매년 11월 10일 전몰군경유족들을 모시고 ‘추모제’를 올립니다. 전 회원과 가족들이 공감하고 있어 감사한 일이지요” 옆에 있던 한 회원에게 왜 지회장님이 이렇게 장기집권하십니까? 하니 “회장님 스스로가 말이 없는 분이고 또 회원들에게는 아무 말이 없도록 매사를 처리하는 현명한 분”이라며 “지금 무보수로 일하지만 만약 월급 많이 주는 곳이 있어도 못 가게 꼭 잡고 싶은 분”이라고 했다.

#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첫째 동족상잔의 비극, 전쟁이 앞으로 없기를 기원합니다. 6. 25전쟁 3년 6개월간 한국군 62만 2천명(전사 13만 8천여 명, 부상 45만 8천여 명, 실종 포로 3만 3천여 명), UN군(16개국) 15만 5천여 명, 민간인 37만 4천여 명(사망 학살), 부상 23만여 명, 납치 행방불명 32만 8천여 명, 전쟁미망인 30만여 명, 고아 10만여 명, 이산가족 1천만여 명이란 엄청난 숫자에다 귀한 인명피해는 아무리 오래가도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겼고 또 잇따른 재산상의 손실은 그 얼마였습니까? 둘째 아직 저는 자식으로서 불효막심하게 아버지 유해도 찾지 못한 채 오직 국립 현충원 위패실에 양위분 위패만 모시고 있는 중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의 뼈 일편이라도 발굴해 눈으로 보고 자식 손으로 보듬어 안고 와 국립묘지에 안장시켜드리는 것이 온 가족의 소망입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마주 보고 앉았던 사람의 마음에까지 안타까움과 애끓는 슬픔이 가득차게 했다.

전우성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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