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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향교로 가는 길목에 있다하여 ‘향교골(鄕校谷)’우리마을탐방[250] 하망동 향교골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6.07 16:22
  • 호수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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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향교 창건 내력·정토사 연기설화 전해져
철탄산 동쪽, 볕 좋은 마을에 산바람 불어와

향교골 전경
향교골 후경

하망동 향교골 가는 길
향교골은 영주향교(영주여고) 동편에 있는 마을이다. 영주초 앞에서 동쪽방향 봉화통로로 간다. 동산교회 앞에서 20여m 더 가면 왼쪽에 향교골(향교길)로 가는 골목이 나온다.

좌회전하여 골목길로 100여m쯤 올라가면 다시 좌측에 향교로 가는 길(명륜길)이 보인다.

지난달 22일 향교골에 갔다. 이날 교동노인회관에서 맹달호 12통장, 이정원 11통장, 이유상 전 노인회장, 나춘실 총무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향교의 전설과 향교골의 내력을 듣고 왔다.

영주향교 모습

역사 속의 향교골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團練使)-순안(順安縣令)-영주(知榮州事)로 불렀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향교골 지역은 영천군 봉향리(奉香里) 화천방(禾川坊)이라 부르다가 1750년경 면리로 개편할 때 봉향면 화천리가 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봉향면 하망동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하망리에 편입됐다. 그 후 1940년 영주읍 하망리에 속하고, 1980년 영주시 하망동에 속했다가 1995년 통합 영주시 하망동 11-14통으로 편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영주의 진산인 철탄산에는 보름골, 향교골, 신사골, 숫골, 관사골 등 골(谷)이 많다. 철탄산 동편 산록에 있는 향교골은 영주향교로 가는 길목에 있다하여 ‘향교골’이라 부른다.

영주 사람들은 간혹 “상망동사무소에서 안양사를 지나 영주여고로 올라가는 골이 향교골이지 왜 동산교회 동쪽골이 향교골이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향교골에 사는 나춘실(노인회총무) 씨는 “예전에 향교나 서원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세워졌다”며 “당시 안양원 쪽에는 마을이 없었고, 화천리(동창산업), 망동리(보름골), 원당리(하망동사무소), 광승리(휴천1동사무소)에 사는 유생들이 향교로 갈 때 대부분 이 길(향교길)을 이용했기에 여기가 향교골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유상(79) 전 노인회장은 “조선 때 향교골 지역은 봉향면 화천리(禾川里)였다”며 “‘화천’을 벼 화(禾)자에 내 천(川)자를 쓴 것으로 봐서 이곳은 논이 많은 평야지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1930년대(일제 때) 찍은 영주 전경 사진에 보면 철탄산 자락에만 집이 있고 지금 시내지역은 모두 논이었다.

영주향교 창건 이야기
향교란 고려말-조선시대 때 지방에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으로 요즘으로 치면 ‘공립대학교’라 할 수 있다. 예전에 가학(家學)을 마치고, 서당(書堂)에서 공부한 학생 중 재주가 뛰어난 학생들이 입학해서 공부하던 곳이 향교다. 이 무렵 향교의 학생 수는 대략 많을 때 5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영주향교는 일찍이 고려 공민왕(恭愍王17) 1368년 때 세워졌다. 당시 문과에 급제한 젊은 유학자 하륜(河崙,1348-1416)이 지영주사(知榮州事,군수급)로 부임하여 영주향교를 창건했다고 향교 역사에 나온다. 이 무렵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쓴 아버지(정운경鄭云敬,1305-1366)의 행장(行狀)에 「겨우 10여세에 영주향교에 들어갔다가 1320년 복주목(福州牧,안동) 향교에 진학했다」는 기록이 있어 1368년 보다 앞서 설립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후 세종 때 군수 반저(潘渚)가 중수했다는 기록 등이 있어 향교의 역사는 651년이 됐다. 근세에 와서 1951년 영주여중이 향교에서 문을 열었고, 1954년 영주여고가 설립되어 중·고 병설로 운영되어 오다가 1982년 여중이 서천교 건너로 분리 이전해 나갔다.

옛 정토사 흔적(안양사)

삼국 때 절, 정토사 연기설화
영주향교 자리에 신라 때 지은 정토사(淨土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정토사 연기설화(緣起說話)에 “본래 날이군(捺已郡,신라 때 영주)이요 지금의 강주(剛州,고려 때 영주)다”라는 구절이 있어 ‘옛 정토사 설화의 배경이 영주’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토사 설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승려 조신(調信)이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했다.

조신은 관음보살에게 그 여인과 살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그 여인은 이미 배필이 있었다. 이를 원망하여 슬피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꿈속에 김 낭자가 기쁜 낯으로 나타났다. 고향에 가서 자녀 다섯을 두고 40년을 살았다. 늙고 병들어 쓸모없는 사람이 되자 부인과 헤어지기로 했다. 작별을 하고 떠나려는데 잠이 깼다. 그는 관음보살 앞에 잘못을 뉘우치고 사재(私財)를 내서 정토사를 세웠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광수(李光洙)는 「꿈」이라는 작품을 썼다. 지금도 안양사에 가면 옛 정토사 주춧돌 등 흔적이 남아 있다.

1500년 전 조신의 사랑 이야기는 ‘애정에 대한 세속적 욕망은 결국 허망하다’는 불교적 가르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정토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다. 예전에 의상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설(說) 할 때 수천명의 승려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 때 영주 정토사 주지가 날이들(捺已平野,지금 신영주)에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제공했다고 한다. 또 고려 말 지영주사로 부임한 하륜이 정토사를 폐사(廢寺)하고, 그 위에 향교를 지을 때 승려들의 반발이 거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후 하륜(河崙)은 태종 6년 전국 3천 6백여 사찰을 폐하고 유교의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수해주택 1961년 모습
수해주택 현재모습(2019)

과 자취방(自炊房)
맹달호(71) 통장은 “일제 말 교통이 발달하고 신작로가 생기면서부터 농촌인구가 시내 지역으로 많이 이동했는데 이 무렵 향교골에도 많은 집들이 들어섰다”며 “특히 1961년 영주대수해 때 수해복구 주택 65채를 이 골 상부에 지으면서 마을이 커졌다. 당시 수해주택은 지금 원형은 그대로 두고 현대식으로 증개축됐다”고 말했다.

백춘남(89) 할머니는 “향교골은 (영주여고 옆에 있어) 방하나 부엌하나 여학생 자취방(自炊房)이 많았다”며 “최근 시(市)에서 추진한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도로가 넓어지고, 다닥다닥 붙어있던 작은 집들이 대부분 철거되는 등 살기 좋은 마을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경로당 실버요가
숲속 교동경로당
교동공원
향교골 사람들
조점선 할머니
최계현 할머니

향교골 사람들
이유상 전 노인회장은 “영주향교의 역사가 우리 마을의 역사”라며 “향교가 있는 마을이기에 경로당 이름도 학교 교(校)자를 써 교동(校洞)경로당이라 했다. 우리 마을은 영주향교의 학풍을 이어받아 학문과 예의를 중시하는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이정원 통장은 “교동경로당은 하망동 11,12,13,14통 지역으로 범위가 넓고 노인회 회원도 영주시에서 제일 많다”며 “어르신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실버요가, 체조교실 등 건강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교동경로당 덕에 건강을 회복했다는 김은희(58) 씨는 “몇 해 전 수술을 받고 입맛을 잃었을 때 권봉순 총무님을 비롯한 여러 형님들이 저를 불러 밥을 짓고 된장을 끓여 밥을 챙겨 주는 바람에 입맛을 찾아 빨리 회복하게 됐다”며 “교동경로당은 저뿐 아니라 어르신들 모두를 지성으로 돌보고 있다. 정말 사람을 살리는 경로당”이라고 말했다.

권봉순(78) 총무는 “교동경로당은 영주시에서 회원(100명)이 가장 많고 잘 돌아가는 경로당”이라며 “맹달호·이정원 통장님, 김필한 회장님, 이유상 전 회장님, 나춘실 총무님의 지원과 회원 모두가 솔선수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기 시흥에서 3년 전 이곳으로 왔다는 정정교(89) 할머니는 “여기 오니 바람과 볕이 좋아 절로 기운이 난다”면서 “늘 앞장서서 일하시는 회장, 총무님과 늘 수고 많으신 홍영자·권영희 동생과 교동경로당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조점선(88) 할머니는 “하루 일과 중 경로당 올 때가 제일 좋다”며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서로서로 돌봐주고 같이 밥 먹는 것과 화투치는 재미가 제일”이라고 말했다.

고향이 부석 감살미라는 최계현(87) 할머니는 “고향은 학마을이라서 좋고, 지금 사는 마을은 향교골이라서 좋다”며 “향교골은 남향이라서 하루종일 볕이 좋고, 마을 뒤는 철탄산이 바람을 막아 따뜻하고 아늑하다”고 자랑했다. 교동경로당과 교동공원(놀이터)은 숲이 좋다. 이 마을 이유상 전 노인회장이 20여 년 간 심고 가꾸었다고 교동사람들이 귀띔해줬다.

맹달호 12통장
이정원 11통장
이유상 전 노인회장
나춘실 총무
권봉순 여성총무
김은희 씨
권영희 씨
백춘남 할머니
정정교 할머니
홍영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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