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다시 5월이다. 오월에 떠난 바보를 생각한다. 성은 노요 이름은 무현이요 별명이 바보다. 그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겨우 상고를 졸업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고시 공부를 해서 서른 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판사를 그만 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돈이 되는 부동산 관련 변호사 일을 해서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식구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그가 사회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부림 사건의 변호를 맡고부터였다. 부림 사건은 부산지역의 지식 청년들이 ‘전환시대의 논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책을 읽으며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안기부가 ‘정부 전복집단’으로 조작한 대표적 공안사건이다.

이 사건의 변호를 맡으며 공권력이 얼마나 시민을 억울하게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약자들의 편에서 부당한 권력과 싸웠다. 그가 싸운 대상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짓과 폭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는 세력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까, 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적 힘이 필요했기에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5공 청문회에서 그는 부도덕한 기업인에게 ‘월급 줄 돈은 없고 권력자에게 뇌물 줄 돈은 있느냐’고 거칠게 질타했다.

다른 의원들이 회장님이라고 조아리는 왕 회장에게도 거칠게 질타했다. 거짓으로 일관하는 전두환에게는 명패를 집어던졌다. 늘 권력에 조아리고 시민에 군림하던 정치인만 보던 사람들에게 그의 의정활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로 인해 ‘청문회 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남과 호남에서는 어떤 당의 공천만 받으면 부지깽이를 갖다 놓아도 당선되는 게 현실이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당선이 확실시 되는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출마해서 내리 세 번이나 낙선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선비정신이다.

시민들은 그런 그에게 바보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리고 ‘노사모’란 전국모임이 탄생되었다. 노사모의 열풍으로 그는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되자마자 반대자들은 그를 대통령 깜이 아니라고 했다. 상고 출신이라 하고 정치인의 말투가 아니라 하며 <조선일보> 등의 언론은 연일 그를 흔들었다. 드디어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되었지만 대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임기간 휘둘리기만 했다. 그래도 대통령을 비판하는 자를 권력으로 억압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재임기간 내내 휘둘리기만 하다가 퇴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농부가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런 그에게 MB정권은 측근을 하나 둘 잡아들이고 드디어 그에게까지 뇌물죄를 물었다. 대검중수부의 젊은 검사에게 모욕을 당한 그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선비는 죽을 수는 있지만 모욕을 당할 수는 없음이었다.

박연차에게 10억 원 남짓한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죄명이다. 그것을 언론에서는 달러로 환산하여 ‘100만 불의 사나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박연차는 빌려주었다 하고 바보는 혜택을 준 게 없으니 뇌물이 아니라 했다. 아직도 분명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그보다 깨끗한 대통령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바보가 떠난 5월의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다. 다시는 그런 바보를 만날 수 없음에 먼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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