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3, 전 영주문화원 이사)

병산 선생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국정을 어지럽히는 권신들을 멀리하였고 우국충정으로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그 후손들이 선조(宣祖)무렵에 영천 휴천(休川)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긴 지는 인조(仁祖)무렵인 듯하다.

동네 가운데 있던 호수는 매립돼 아파트가 들어섰다. 반세기 동안 영주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넷째, 동구대의 문제를 어찌하면 좋을까? 동구대 거북머리 앞으로 중앙선 철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란하게 달리고 있다. 영주의 상징인 귀산(구성공원)은 거북이의 몸통이고, 동구대는 거북이의 머리로 서천은 거북이가 마시는 생명수였는데, 물길을 돌린 지 반세기가 넘었다. 거북이는 58년 동안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했다. 그렇게도 활기 넘치던 영주가 지금은 기진맥진하여 걸음을 멈출 지경에 이르렀다.

지칠 대로 지친 거북이는 더 이상 영주를 끌어갈 힘이 없다. 아득한 옛날부터 귀산(구성공원)은 영주를 굳건히 지켜왔고,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을 함께 하였다. 이제는 수해 당시를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신축년(1961년)에 내가 19살이었는데 어느덧 76살이다. 오늘도 거북이는 물 한 목음을 애타게 기다린다.

5.16군사혁명이 일어 난지 불과 56일 만에 수해가 일어났다. 혁명정부에서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치밀한 계획으로 기대이상의 수해복구를 완성하고 새 영주건설도 이루어 내었다. 국군장병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신축년(1961년) 영주대수해사건은 영주가 생긴 이래 두 번째로 큰 사건이다. 첫 번째 사건은 1457년의 순흥의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정축지변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주도한 단종(端宗)복위의거다.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은 사사되었고, 순흥 백성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으며 부(府)는 혁파시켜버렸다. 그로부터 226년 뒤, 1682년(숙종8)순흥부가 복설되었다.

영주는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은 순흥 백성들을 위하여 사당(祠堂)한 칸 마련하지도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1453년(단종2. 계유년)에 일어난 계유정난과 1456년(세조2) 사육신 단종복위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세조의 정권에 반대하여 조정의 많은 절신(節臣)들이 이곳 영주로 모여들었다.

그 이유는 금성대군이 순흥에 유배를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절신 후손 이십 여명이 한자리에 모여서 그 옛날 선조님의 숭고하신 정신을 상기하고, 오늘의 현실을 토론하면서 늦었지만 후손들만이라도 최소한의 예(禮)를 갖추어 보자고 의미깊은 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몇 년 못가서 한계를 넘지 못했다. 뒷받침이 없으면 어떤 일이든지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영주대수해사건은 영주역사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영주사(榮州史)어디에서도 이 기록을 소상하게 밝힌 곳을 보지를 못했다. 이 글을 남기기 위하여 선배님과 친구들을 수시로 찾아다니면서 당시의 사태를 하나하나 뒤돌아 살펴보고 의논하며 정리했다.

여기에 도와주신 고마운 분의 이름을 적어둔다. 송창환님, 이세호님, 박회웅님, 김창수님, 박유서님, 우경달님, 김백님, 김상훈님 외 여러분이다. 이제 당시를 살던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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