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3, 전 영주문화원 이사)

서천이 흐르던 자리와 넓은 들판은 모두 시가지로 변하여 원래의 영주시가지 보다 더 넓은 신영주라는 신도시가 탄생을 했다. 1980년 4월 1일 영주가 시(市)로 승격이 되자, 신영주에 시청을 지어서 옮겨갔다. 영주의 진산인 철탄산 아래 영주군 자리는 이 지역의 최고명당으로 이름난 곳이며 옛 관아(官衙)였던 곳을 비워버리고 왜 신영주로 시청을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축년(1961년)영주수해사건은 영주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1955년 영암선이 개통되면서부터 강원도 탄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고, 따라서 영주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주역에는 사람과 물자수송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원래 관문이 바빠야 먹을 것이 생기는 법이라 했다. 전국각지에서 강원도 탄전으로 이사를 들어가는 인구가 날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뒤이어서 식량, 부식, 기타 일반 생필품 등이 대량으로 줄을 이어 들어갔다.

한편 강원도탄전에서 무연탄을 싣고 나오는 화물열차가 꼬리를 물고 줄을 이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철도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영주의 상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강원도 탄전의 노무자가 십여 만 명이 넘었다. 영암선 개통 전에 우리나라 무연탄 수급과정을 살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강원도 탄전지대(철암역과 도계역등)에서 무연탄을 열차에 싣고 묵호항으로 운송을 하면 묵호항에서는 선박에 옮겨 싣고 포항, 부산, 목포, 군산, 인천 등 항구로 운송을 한다. 각 항구에서는 다시 자동차 혹은 기차로 수요지까지 공급을 하는 실정이었다.(철암~묵호 간 철도는 1940년 개통됨.)

따라서 영암선이 개통되면서 무연탄 물류비용이 톤당 2,328환에서 260환으로 크게 절감되었고 운송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축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원동력인 무연탄 수송의 중심에는 영주가 있었다. 한편,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등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영주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열차연결이 가능하였으니 영주역전은 언제나 인파로 넘쳐났다. 기차표가 매진되면 하루를 더 영주에서 묵어야만 목적지로 갈 수 있었다. 영주역전에는 수많은 여관과 여인숙과 식당과 유흥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는 역전에 나오면 구경거리가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구두 닦는 소년들만 수십 명에 달했다.

영주역 화물취급소에는 강원도 탄전으로 물품을 발송하는 상인들로 늘 복잡했다. 심지어 ice cake까지 강원도 시장을 석권했다. 영암선이 개통된 후, 동해안에서 잡은 싱싱한 생선들이 아침에 묵호항을 출발하여 한낮이면 영주역에 도착했다.

그동안 영주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간 고등어와 조기, 꽁치, 멸치, 말린 새우, 상어고기, 마른오징어, 기타 건어물과 미역 등을 해산물로 알았는데,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통 고등어, 정어리, 꽁치, 상어, 산 오징어, 산 문어, 소라, 대게, 새우, 물미역 등 처음 보는 해산물들이 날마다 공급되었다.

당시에 묵호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은 낮에 영주에 도착하여 생선을 다 팔고 오후 기차로 묵호에 갔다가 그 이튿날 다시 싱싱한 생선을 가지고 영주에 와서 장사를 했다. 영주문어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것도 그때 묵호아줌마들이 가지고 온데서부터 유래가 되었다.

동해안의 싱싱한 생선은 영암선을 타고 영주에 와서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서울, 대구, 대전 등 내륙지방 시민들의 식탁에도 오르게 되었다. 이 역시 영암선개통의 덕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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