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3, 전 영주문화원 이사)

당시에 귀산(구성공원)과 동구대는 영주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평일에도 많은 시민들이 나들이를 하였다. 특히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 인기가 매우 높았던 곳이다. 그러나 신축년(1961년)수해로 동구대와 서구대와 서천의 운명은 갈라지고 말았다. 서구대는 없어지고(대순진리교 자리) 서천은 멀리 서편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옛날에도 여름철이면 서천냇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멱을 감고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동구대의 쪽박소에는 해마다 익사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쪽박소 부근은 수심이 깊고 불 바위 쪽에서 유입되는 물살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쪽박소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 물살에 사람이 휩싸이게 되면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일 년에 두세 사람씩만 희생이 되었다고 해도 천여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무서운 곳이다.

지금은 쪽박소를 흙으로 메워놓았다. 쪽박소 위편 암벽에는 계심대(溪心臺)란 글씨가 있고 그 옆에 정덕원년월일(正德元年月日)이라는 6자가 새겨져 있었다.

정덕원년(正德元年)이면 명(明)나라 연호로서 1506년(중종1)이며 당시 영천군수는 이항(李沆)이고 박눌(朴訥)이라는 사람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

이 글씨도 지금은 흙으로 묻어 놓아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암벽 속에서 오백 수십여 년 전에 쓴 글자가 남아 있음을 아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

동구대는 전체가 암석으로 평편한 곳은 십여 명이 앉아서 놀 수 있으며, 물이 푸르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예부터 많은 문사들이 모여서 자연을 감상하고 시를 짓고 뱃놀이를 즐기던 장소였다. 서쪽으로는 죽령(竹嶺)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학가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며 병풍처럼 펼쳐진 소백산을 배경으로 이곳의 운치는 더할 나위 없이 그윽하였다.

동구대 서편에는 또 하나의 대(臺)가 있으니 바로 경치가 일품인 서구대이다. 두 대(臺)의 거리는 겨우 백 여보쯤 되었는데 서천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서구대는 산수와 풍광이 절묘하고 명미했으며 영남에서도 이름있은 구학정(龜鶴亭)이 있던 곳이다.

구학정은 조선중기 대사헌을 지낸 백암(栢巖)김륵(金륵.1540~1616)선생이 만년에 지은 정자로 규모와 꾸밈세가 으리으리하고 단청이 아름다웠으며 금으로 쓴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전한다.

구학정 안에는 백암과 가까웠던 류성룡(柳成龍), 차천로(車天輅), 홍가신(洪可臣), 이수광(李수光), 이식(李植)등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의 찬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름답던 물길도 비단결같이 펼쳐졌던 백사장도 자취를 감추었고, 그토록 우아하고 품격 높던 구학정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쉽다.

그 자리에는 종교단체와 상가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동구대는 서천과 서구대와 백사장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고장의 유적지가 하나씩 사라져갔다. 조선조에 단종임금이 폐위되자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영주로 낙향한 집의(執義) 송인창(宋仁昌)선생은 동구대를 유상(遊賞) 장소로 가까이 하여 일명 집의대(執義臺)라 불렀다.

송인창(宋仁昌)선생은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본래 경기도 광주 사람인데 영주에 자리 잡기는 아버지 동강(東岡)송계(宋啓)선생으로부터 비롯된다. 동강선생이 영주로 낙향하게 된 데는 그가 영주의 토족인 부사 민용(閔용)의 사위였기 때문에 반연의 사연도 있었지 싶다.

더하여 동강선생의 사위인 문손관(文孫貫)도 영주인으로서 문과에 올라 전적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인 문경동(文敬仝)이 문과에 올라 예천군수와 청풍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들은 영주남쪽 남산 고개 넘어 초곡(草谷. 지금의 조암리)에서 크게 번창한 가문이다. 이퇴계선생의 부인 허(許)씨는 문경동의 외손녀가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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