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면 조제2리 ‘세거리(三溪)’

고려 충신 돈옹 박구-조선 선비 농포 박환소 후손
1803년 농포공의 증손 운기·득기·만기 삼계 입향

삼계 마을 전경
삼계 경로당
영해박씨 세거지향

문수면 조제2리 삼계 가는 길
삼계마을은 연화산(蓮花山) 줄기가 남으로 뻗어 내리다가 내성천 강물과 만나는 곳에 있다.

휴천동 남산육교사거리에서 문수방향으로 간다. 노벨리스코리아에서 좌회전하여 와현-전닷-화방마을 앞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영해박씨삼계세거지향’ 표석을 만나게 된다.

지난달 30일 삼계마을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박회기 노인회장, 박낙원 노인회총무, 우인순 할머니, 류순우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삼계 마을
영주는 조선조 태종13년(1413)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조제리 지역은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진혈리(辰穴里) 조제방(助梯坊)이라 부르다가 170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될 때 진혈면 조제리(助梯里)가 됐다. 

1896년(고종33) 조선말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 영천군 진혈면(辰穴面) 조제동(助梯洞)으로 개칭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문수면 조제2리에 편입됐다.

1980년 영풍군 문수면 조제2리, 1995년 영주시 문수면 조제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회기 노인회장은 “조제2리는 삼계, 멱실, 금영골 3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돼 있다”며 “삼계의 경우 해방 후에는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20여 가구 남짓 살고 있다”고 말했다.

母:우인순과 子:박원태
천상운집(千祥雲集)표석
복거지향기(卜居之鄕記)

, 복거지향
삼계마을은 연화산 줄기가 남으로 20여리 뻗어 내리다가 내성천을 만나 이루어진 나지막한 야산 구릉에 자리 잡았다. 강 건너 마주 보는 학가산(鶴駕山)은 장엄하면서도 정답게 다가온다. 삼계란 내성천(內城川)과 금영곡에서 내려오는 금영계(今寧溪)와 전닷에서 발원한 화방계(花芳溪) 등 3계의 물이 합수되어 흐른다 하여 삼계(三溪) 또는 세거리라고도 한다. 마을 앞 표석에 천상운집(千祥雲集) 복거지향(卜居之鄕)이라고 각각 새겼다. 수많은 상서로움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곳이요, 살만한 곳을 가려서 세거지를 정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 앞에서 서쪽으로 가면 예천 보문으로 통하고, 동쪽으로 가면 안동 북후면 석탑으로 통하는데 예전에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우인순(87) 할머니는 “예전에 나루터는 보지 못했지만 새댁시절 외나무다리가 있었다”면서 “당시는 길도 없고 다리도 없고 겨우 사람과 소바리가 다니는 길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영해박씨 돈옹공파 후손
마을 앞에 「영해박씨삼계세거지향(寧海朴氏三溪世居之鄕」이라고 새긴 표석 뒷면에 「조상의 뿌리요 혼이 살아 숨 쉬는 곳, 유서 깊은 내 고장 정든 세거리. 시조 관설당(觀雪堂) 휘(諱) 제상(堤上)의 후예(後裔) 복거지향(卜居之鄕), 농포공(農圃公) 후손」이라고 새겼다.

삼계의 영해박씨는 「시조 관설당(觀雪堂) 제상(堤上)-2세 대녕군(大寧君) 백결(百結) 박문량(朴文良)-돈옹(遯翁) 박구(朴球,1330-1409,돈옹공파 파조)-박구의 8세손 농포(農圃) 박환소(朴還巢,1658-1739)-10세 근졸재 박성휘(朴聖輝)-11세 박운기(朴運起)·박득기(朴得起)·박만기(朴晩起) 삼계입향-운기 아들 박화영(朴華瑛)-운기의 손자 창계(蒼溪) 박삼수(朴三秀,1831-1907)로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류순우(82) 할머니는 시조 충렬공 관설당 박제상 선생 실기를 보여주면서 “삼계의 영해박씨는 관설당 시조의 후예답게 충효예를 잘 실천하고 모범을 보인다”며 “20여 년 전 까지만해도 글 잘하는 선비들이 많으셨으나 다 돌아가셨지만 그 정신만은 오래오래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영해박씨 삼계 입향 내력
문수면 남쪽 끝 세거리(三溪)에 영해박씨가 자리 잡은 것은 1800년경으로 추정된다. 삼계에 사는 영해박씨는 돈옹공파로 돈옹(遯翁) 박구(朴球)의 후손들이다.

돈옹공은 고려 충정왕(忠定王) 원년 20세에 태평과에 장원급제하여 권농병마단련판관(종6품 무관)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기실어촌(只失於村)에 숨어 절의를 지켰으며, 마을 이름을 기사리(棄仕里,벼슬을 버리다)라 했다. 돈옹의 10세손 농포(農圃) 박환소(朴還巢,1658-1739)는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기사리에서 상산(商山,학가산 동남쪽) 아래로 옮겨 난을 피했다.

농포공은 통정대부 돈영부 도정을 지냈으며, 수(壽)는 82세다. 농포공의 증손 박운기(朴運起)·박득기(朴得起)·박만기(朴晩起) 3형제가 상산에서 삼계로 이거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卜居之鄕)을 마련했다. 마을 앞 표석에 「삼계 200년 세거기념. 2003년 호암(祜庵) 사현(社鉉) 기(記)’이라고 새겼으니 1803년 입향한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창계정사(蒼溪精舍)

선비 박삼수가 세운 창계정사
삼계마을 북편 언덕에 정자가 보인다. 올라가서 보니 ‘창계정사(蒼溪精舍)’라는 현판이 있다. 이 정자는 조선말 영주지역의 큰 선비 박삼수(朴三秀)가 거처하던 처소로 그 후손이 다시 이룩했다.

창계정사의 주인 박삼수(1831~1907)는 초명이 용수(龍秀)이고, 자는 치운(致雲), 호는 창계(滄溪)이다. 창계는 농포공의 6세손이며, 박화영(朴華瑛)의 아들이고 입향조 박운기(朴雲起)의 손자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로 도리에 힘쓰고 글도 잘했다. 일찍이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에 나갔다가 초연히 초야에서 산수에 뜻을 붙여 지냈다. 그는 해박한 학식에 행실이 있어 지역 명사들과 도의(道義)로써 사귀었으며, 당시 학행이 그를 앞서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됐다.

무고대(舞鼓臺)

무고대(舞鼓臺)
무고대는 삼계마을 앞 삼거리 큰 물가 절벽 위에 있다. 층층으로 깎아 드리운 바위가 백길 높이로 솟아 내성천을 굽어보고 있으며 멀리 학가산과 마주한다. 이곳은 창계공이 즐겨 소요하던 곳으로 1972년 후손들이 그를 추념하기 위해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대(臺)의 이름 그대로 무고대(舞鼓臺)라 했다.

김홍락이 쓴 기문에 보면 「무고대의 앞쪽에 거북이가 엎드린 모양의 바위가 있고, 뒤에는 푸른 절벽으로 병풍을 둘렀으며, 남쪽으로는 반석이 난간처럼 둘렀는데, 그 안에 10여명이 앉을 만큼 평편한 공간이 있다. 석탑교 위에서 무고대를 바라보면 맨 아래쪽 바위가 북처럼 생겼고 그 위의 바위는 마치 무녀가 고깔 쓰고 춤추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춤출 무(舞)자에 북 고(鼓)자를 써 무고대(舞鼓臺)라 했다 한다.

삼계마을 사람들
삼계마을 경로잔치

삼계마을 사람들
박회기 노인회장과 약속을 하고 오후 1시 삼계마을회관에 도착했다. 회관에는 박 회장을 비롯한 어르신 여러분들이 기자를 환영했다. 박낙원 총무는 “삼계는 영해박씨 200년 세거지로 훌륭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그 후손들은 지금 전국 각지로 진출하여 각계각층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인순 할머니는 “단양우家에서 영해박家로 시집왔다”며 “양가 모두 명문가”라고 말했다. 권오순(92) 할머니는 “예전에는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며 살았다”며 “양반집 부녀자들은 농사일 보다 명잣고, 베짜는 일을 많이 했다”고 했다.

류순우(82) 할머니는 “예전에 소 지르매로 모든 것을 운반했고, 디딜방아 찧어 먹고 살았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정분선(82) 할머니는 “울릉도에서 태어나 3살 때 삼척으로 나왔다”며 “강원도에 살다가 20년 전 남편 고향으로 귀촌했다. 산수경관이 좋은마을”이라고 말했다.

봉화 명호에서 시집 왔다는 금차연(86) 할머니는 “6.25 나던 해 봄 봉화 명호에서 삼계로 시집왔다”며 “예전에 삼계는 길도 없고 차도 없는 곳으로,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었다”고 말했다.

감천 복골에서 가마타고 시집 왔다는 김연주(78) 씨는 “예나 지금이나 마을의 모습은 변함이 없지만 당시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집집마다 아이들이 북적북적했다”고 말했다. 김정자(79) 씨는 “선대 어르신들이 학문을 중시한 덕에 후손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사무관, 서기관, 이사관을 많이 배출한 마을”이라고 말했다.

황덕희 할머니
박성원 어르신

남영자(78) 씨는 “예전에는 아이들 30여명이 줄지어 학교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비오는 날 아이들이 쓰고 가는 빨간우산 파란우산 풍광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박낙원 총무의 안내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가는 길에 마을 앞산 밭에서 일하는 박원성(93)·황덕희(87) 어르신을 만났다. 박 어르신은 “지금은 요만큼(300평) 텃밭농사만 짓는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박회기 노인회장
박낙원 노인회총무
권오순 할머니
우인순 할머니
금차연 할머니
정분선 할머니
류순우 할머니
김정자 씨
김연주 씨
남정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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