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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 확대경[194] 임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건국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4.13 09:51
  • 호수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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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 이전

올해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고, 4월 11일은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국의 많은 의인들이 조국 독립운동에 나섰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물론 임시정부에도 많은 군자금(軍資金)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는 암울한 시기여서 독립운동의 가시밭길 못지않게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사람들도 커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정말 독립운동 단체가 맞는지? 독립운동을 가장한 괴한은 아닌지? 자신이 보낸 자금이 잘 전달되는지? 혹시 일경에게 노출되지나 않을지? 등등 온갖 것이 걱정스러웠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은 최준(경주 최부자)이 경교장(京橋莊, 환국 임시정부 청사)을 찾은 일화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백범이 최준을 경교장으로 초청, 그가 받은 독립운동 자금 장부를 보여주며 감사의 뜻을 전하자 최준은 갑자기 안희재의 묘소를 향해 대성통곡을 했다. 자신이 전한 자금의 절반만이라도 임시정부에 잘 전달되었으면 했는데 자신의 독립운동자금명세서와 백범의 독립자금수불부가 한 푼의 착오도 없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의인들은 있었다. 봉화 바래미마을 남호구택(南湖舊宅)의 남호 김뢰식(金賚植, 1877~1935)이 그런 사람이었다. 남호는 경상도의 명망 높은 부호였는데 군자금 모집시 전 재산을 저당하고 대부를 받아 독립자금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춘양의 성암재(醒巖齋, 만산고택 옆집)도 의재 강필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전달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게 상하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환국할 때까지 26년간 국내외를 통할·통치했다. 감시를 피해 최소 7곳 이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일제의 패망 후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자격의 귀국이었다. 임시정부가 미국 등의 열강들에게 승인을 받지 못한 탓이었다. 최근 건국절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견해 또한 요란하다. 당시 요인들의 임정 수립 기념행사 기록에 따라 1919년 4월 11일을 지지하는 견해, 일제가 만든 「조선민족운동연감」에 나와 있는 기록을 근거로 4월 13일이어야 한다는 의견, 한성임시정부가 출범한 4월 23일이 타당하다는 이야기, 임시정부들이 상하이를 중심으로 통합한 9월 11일 지지하는 단체, 식민통치로부터 독립된 1945년 8월 15일이 좋다는 주장, 국가의 3요소를 제대로 갖춘 1948년 8월 15일이 타당하다는 여론 등이 그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을 잘 갖춘 정부는 아니었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승인도 그렇지만, 말 그대로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냥 두는 게 순리라는 의견이다. 만약 대한민국이 1919년을 건국으로 본다면, 당시의 정부를 「임시정부」로 부르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란 정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의 준비 정부를 말한다. 그리고 그 임시정부는 능률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수립된 기구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도, 대한국민 의회정부, 조선민국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등 예닐곱 임시정부가 있었고, 그 지역도 상하이, 러시아, 서울 등지에서 각각의 임시정부가 제각기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 조직의 실체를 갖춘 것은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서울의 한성정부(漢城政府) 세 곳 정도라고 한다. 가장 먼저 수립된 곳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정부와 국가는 그 의미가 같지 않다. ‘정부수립’과 ‘국가건국’이 그 의미가 다르듯이 임시정부 수립일은 임시정부 수립일이지 한 국가를 탄생시킨 「건국절」은 아니라는 말이다. 반정부 행위와 반국가 행위가 다르듯 정부의 의미와 국가의 의미는 명백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왜 나라를 잃었다고 했을까?

역사는 편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립을 위한 공과를 바탕으로 「수립」이 「건국」으로 둔갑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민족의 역사를 어느 날의 여론몰이로 결정하겠다는 의식이 더없이 위험하게 느껴진다. 1948년 국민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했고, 이은 8월 15일에 새 국가의 탄생을 전 세계에 선포했으며, 또 세계 여러 나라와 수교함으로써 국가승인을 받았고,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2019년 올해는 신라 건국 2076주년(B.C. 57), 고려 건국 1101주년(A.D. 918), 조선 건국 627주년(A.D. 1392), 대한민국 건국은 71주년(1948.8.15.)이 된다.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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