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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창수의 잊혀진 영주역사이야기[38] 신축년(1961년)영주대수해사건(4)류창수(73, 전 영주문화원 이사)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4.13 09:18
  • 호수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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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위문품이 답지했는데 구호금이 3천만 환, 양곡 7천석, 의류 8만 여점, 부식류 5천 500여점, 식사도구 7천300여 점, 학용품 4만 5천여 점, 의약품 등이다. 당시에 많은 가옥과 상가들이 유실되거나 파괴, 침수가 되어서 1만 5천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우선 공공시설에 이재민을 수용하고, 태극당 부근의 질벅질벅한 공터를 마른 흙으로 메우고 정비를 하여 천막을 설치해 나머지 이재민들을 수용하였다.

눈물겨운 천막생활은 수해복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뒤에 천막촌에도 <아리아>라는 다방이 생기고 대포 집(술집)도 생겼으니 사람 사는 곳이란 어디를 가도 다를 바가 없나보다.

이때가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56일 만이었는데, 혁명정부에서는 신속하게 영주수해복구에 대처 하였다. 육군대학총장 이성가(李成佳)장군을 수해복구소장(뒤에 통제관)으로 임명하고 수해복구사무소는 군청 뒤 영훈정(迎薰亭)부근에 막사를 짓고 사무실을 만들어 수해복구 준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수해복구준비가 한창 진행될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의장이 수해현장을 시찰하던 중 한절마을(가흥동) 뒤 구수산(龜首山)끝자락을 절단하고 서천의 물줄기를 서편으로 돌려서 영원히 수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참으로 정확한 판단이었고 지금까지 영주를 수해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안을 혁명정부에 제안한 사람이 바로 영주사람 유욱호씨라고 알려지고 있다. 수해복구사업단에서 이번 수해의 원인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천은 수량에 비해 제방이 약했고 하상이 높았으며 하천의 굴곡이 심한 것이 원인’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수해복구사업단에서는 최종복구계획으로 동구대와 서구대사이로 흐르는 서천의 물길을 한절마을(가흥동)뒤 구수산 끝자락을 절단하고 서천의 물길을 완전히 서편으로 돌린 후, 서천이 흐르던 물길자리와 넓은 남산들을 시가지로 만들어서 신영주라는 새로운 도시건설을 시작하였다.

한편, 피해주택을 최우선으로 신축 또는 수리를 하고 기타 사업은 급한 것부터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본격적 공사는 7월 17일부터 시작되었다. 주민들도 수해복구계획이 매우 잘되었다고 흡족하게 생각했다.

이때 혁명정부에서는 영주출신 현역군인들에게 특별휴가를 제공하여 수해복구를 돕도록 배려까지 하였다.

하천공사로 생긴 부지는 앞으로 문화체육시설용으로 확보하고 우선 공설운동장(영주동 주공아파트 자리)을 조성하고 나머지 부지는 뒤에 실내체육관, 테니스장 등 공공복지 시설 계획으로 남겨 두었는데, 얼마 뒤에 영주군에서 대한생사공장부지(동진 타워와 강변아파트 지역)로 분양하고 말았다. 서천과 동구대, 서구대를 중심으로 수해로 없어져버린 문화유적지와 숨겨진 이야기 몇 편을 소개한다.

어쩌면 영원히 묻혀버릴지도 모를 이야기이다. 서천의 물길은 동구대와 서구대사이로 흘렀는데 하폭이 매우 좁았다. 걸어서 겨우 백 여보(步)의 거리였다.

불바위에서 휘몰아치는 서천물줄기가 동구대 암벽에 부딪치면서 석굴(石窟)이 생겼는데 사람들은 용궁(龍宮)이라 부르기도 하고 쪽박소라고도 불렀다. 귀산(구성공원)과 동구대와 서구대와 서천이 없는 영주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만큼 영주를 상징하는 장소들이기 때문이다. (계속)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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