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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창수의 잊혀진 영주역사이야기[37] 신축년(1961년)영주대수해사건(3)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4.10 12:30
  • 호수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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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원당로(元塘路)로 변하여 좌우로 상가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도로에는 자동차가 줄을 이어 달리고 있다. 누가 이곳을 개천이 흐르던 곳이라고 말할까?

신축년(1961년) 영주대수해가 일어 난지 벌써 58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1961년 7월 11일 영주를 엄습한 수마의 폭위는 혹심하고 처참하였다. 계속 내리던 장맛비가 새벽 3시경 부터는 폭우로 변하여 아침 8시까지 까지 5시간 동안 337mm가 쏟아졌다. 이때 서천이 범람하여 지금의 영일초등학교 부근 제방 30m가량이 무너져서 삽시간에 시가지 2/3이상 침수가 되었다. 

갑자기 황톳물이 노도와 같이 밀어닥쳐서 집들이 모두 물에 잠겨 지붕만 보이고 큰집들이 물 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처참했다.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면서 통곡소리만 사방에서 들렸다.

소용돌이 치는 황톳물에 부유물 들이 둥둥 떠다니고 주인 잃은 지붕이 거센 물살에 휩싸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망연자실하였다. 식구들은 아침밥을 먹고 직장과 학교에 갈 시간에 천지가 뒤집히는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 참담함이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인구 3만 2천여 명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작은 도시에 하늘은 너무나 가혹한 재앙을 내렸다.

당시 후생시장(지금의 고추시장 부근)은 서천제방이 무너진 곳에서 일직선상에 있었으므로 수마의 직격탄을 맞았다. 시장에 쌓아둔 많은 물건들은 손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모두 황토물이 휩쓸어 갔다. 후생시장은 영주에서 유일하게 규모를 갖춘 시장이었다.

오전 9시 30분경(서천제방이 무너지고 1시간 30분 후) 원당천(지금은 이산면 방향으로 물길을 돌렸음)은 시가지로 밀어닥친 서천의 물을 수문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구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긴급대책으로 원당천의 제방 50m을 끊어버렸다. 시가지에 가득 찼던 물들이 남산들(지금의 영주역 방면)방향으로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갔다. 원당천의 제방을 끊고 4시간 30분후, 오후 2시경 물속에 잠겼던 영주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당시 서천의 물길은 서천교~영일초등학교~불바위~동구대~상공회의소~경북자동차정비공장~휴천동천주교~남부초등학교~경북전문대북쪽~서천으로 흘러갔다. 

영주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큰 물난리를 겪었다. 치산치수가 중요함을 새삼 깨달게 되었다.
삼각지 로터리(지금의 분수대)에 세워놓은 수해복구비(碑)는 그 당시 물이 영주 시내를 침수한 높이만큼 비(碑)의 높이를 맞추어서 세운 것이다. 이 비(碑)는 1970년 7월 11일 영주수해10주년을 맞아서 기념사업으로 세운 것이다. 당시 피해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o. 인명피해: 66명
    (사망:14명. 부상:52명).
o. 이재민: 15,319명.
o. 도로: 유실: 3개소 800여m,
    파손:2개소 203m.
o. 토지: 논 매몰:132정보,
    밭 매몰:70정보,
    전답침수:378정보.
o. 수리시설파괴: 32개소.
o. 건물피해: 유실:149동,
    전파:176동, 반파:416동,
    침수:1,971동.
o. 제방파손: 1,370m.
o. 가축유실: 1,479마리.
o. 재산손실:  
    약4억 환.
o. 정부양곡
   침수: 4,114석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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