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부석사 쌍탑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주전(主殿) 앞에 탑파를 하나씩만 세우는 소위 1찰 1탑 형식이 보통이나, 짝을 지어 쌍탑으로 배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부석사에서와 같이 삼층석탑이 3기나 축조되어 있는 경우는 없어 혼란스럽다. 개수도 개수려니와 모양도 상당히 닮아 있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동편 삼층석탑(일명 통일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을 보여주는 삼층석탑으로, 조금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범종루 아래쪽 삼층석탑(일명 쌍탑)이 이 탑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것이어서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분간해내기가 쉽지 않다.

아래쪽에 있는 범종루 앞 2기의 석탑(쌍탑)을 자세히 살펴보자.

부석사 경내로 들어 가장 높다란 대석단 위에 얹힌 회전문을 올라서면 맨 먼저 단아한 삼층석탑 한 쌍이 길 양편에서 손을 들어 환영을 한다. 좌우에 균형을 맞춰 나란히 선 쌍탑은 거의 같은 모습의 석가탑계열이지만, 쌍탑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나 아담한 크기에 지붕돌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진 느낌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 즉 9세기쯤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잘 생긴 쌍탑은 부석사 안내를 위해 일부러 고용된 문화관광해설사 같다. 실제로 영주시문화관광해설사들의 해설도 이 삼층석탑 부근에서 시작된다.

이 탑이 원래 있었던 곳은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78번지로 무량수전을 기준으로 동쪽 약 400m 지점에 현재 자인당에 안치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과 함께 방치되어 있었다.

방동의 폐사지에 있던 두 탑을 1966년 현재의 자리로 이운하였는데, 이운할 당시, 전북 익산 왕궁리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에서 출토된 사리(舍利) 5과(五顆)를 서탑 속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채롭게도 서탑 앞에만 배례석이 따로 놓아져 있다. 규모와 양식이 거의 같아 원래 쌍탑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두 탑 모두 이중기단 형태를 취하고 있고, 상하의 기단 면석에 우주(隅柱, 가장자리 기둥문양)와 탱주(撑柱, 가운데 기둥문양)를 두었으며 갑석에는 각각 1단의 받침과 괴임을 두어 탑신을 받쳤다. 탑신부 몸돌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만 높고 2층부터는 낮아지면서 1층 옥개석을 포함하여 2, 3층의 탑신과 옥개석 모두 적정히 다이어트 되는 간결미가 완성되면서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무량수전(無量壽殿) 동쪽의 석탑(보물 제249호)과 같은 형식을 갖추었으며,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서 신라석탑 양식을 잘 보여 주는 조각품이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들어 올려 가벼움을 실었고, 전 층의 탑신 괴임은 1단, 옥개받침은 4계단 모양을 갖췄다. 상륜부는 망실되었으나 이건이후 보완했다고 한다.

방동 뒤 약사골에 있었던 사찰이 폐사되면서 갈 곳 잃은 쌍탑을 자비의 부석사가 입양하여 범종루 아래 공간에 안치시키고 사찰 안내를 맡긴 모양새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이들 쌍탑도 이제는 부석사의 한 식솔이 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을 함께 높여가고 있다. 지금은 회전문이 가림막 역할을 해주어 석단 위에서 맨몸으로 바람을 맞던 때보다는 좀 더 위엄을 갖추게 된 모양새이다.

동탑 360㎝, 서탑 377㎝로 서탑이 17㎝가량이 더 높지만 육안으로는 쌍둥이 탑으로만 보인다. 엄밀히 따지자면 쌍둥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합쳐서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모양이나 앉아 있는 품세로만 본다면 당연히 보물급이지만, 두 탑은 방동마을 뒷골에 무너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우게 된 신라시대의 이주민(移住民)인데다가 상륜부(相輪部)가 유실되어 국가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고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비록 지붕돌 밑받침 계단이 5단에서 4단으로 줄어드는 약간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전체적으로 당당한 기품을 잃지 않은 모습이어서,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중요한 미술품으로 여기고 있다.

원래 부석사 소생이었다면 주전인 무량수전 앞 어디엔가 안치되었을 것이나 들어온 주제여서 감히 주전 앞까지는 욕심을 내지 못하고 그나마 현재의 범종루 앞 아담한 공간을 빌려 역할을 다하는 충실한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조각이 섬세하지는 않으나 탑신의 비례가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에 들며, 동·서 양쪽 탑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전반적으로 대단한 규모로 빚어진 탑은 아니지만, 적절한 비례로 안정감을 찾고 짜임새 있는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의 수수한 차림을 한 쌍탑은, 다시는 이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굳건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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