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대한광복단 추모탑

1913년 채기중이 풍기에서 결성한 ‘풍기광복단’은 국내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이다. 구한말부터 풍기지역은 이미 의병활동의 주요 기지였다. 청일전쟁을 빌미로 한반도를 장악한 일제에 대한 거국적인 항거 의병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방이 되자 이에 채기중은 10명의 단원들을 규합하여 ‘풍기광복단’을 조직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의병출신이거나 유림, 계몽운동가 등 사회지도층이었다. 채기중은 원래 함창(상주) 출생이지만, 을사조약 후 국권회복운동 투신을 위해 미리 풍기로 이주해 있었다. 이곳 의병활동은 풍기의 지리적 여건과 관련이 깊다고들 말한다. 전국 제1 피난지로 알려진 곳이어서 팔도 이주민 유입이 잦고 유동인구가 많았으며, 소백산이 깊어 지사들이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점 때문이다.

1910년 이전 구한말 청일전쟁을 빌미삼은 일본의 노골적인 조선침탈에 격분한 ‘의병활동’과,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제치하의 식민통치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은 사실상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넓혀 보면 모두가 일제의 주권침탈을 전후한 조국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1910년 이전은 형식적이나마 아직 국권이 살아있었으니 독립운동이라는 표현이 합당치 않아 ‘의병활동’으로 부른 셈이고, 1910년 이후는 공식적 국권찬탈이 이루어진 식민지 상태였으므로 ‘독립운동’이라는 용어가 합당하게 된 것일 뿐, 이나저나 모두 조국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이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특히 의병활동은 양반, 상민의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는 구국일념으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민족저항의 발로였다. 의병활동의 최고조는 강제로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의 선포인 1895년으로 꼽을 수 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국치(國恥)가 있었고, 다시 5년 뒤 1915년에는 이를 만회하고 조국독립을 쟁취하고자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만주로 건너간 독립투사들의 활동은 이미 계속되고 있었지만, 국내의 독립운동은 ‘풍기광복단’으로부터 태동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비밀리에 운영되다보니 활약이 크게 두드러질 수 없었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조직의 확대를 위해 1913년 결성되어 풍기를 거점으로 이미 활동하고 있었던 의병계열의 ‘풍기광복단’과 1915년 2월 대구에서 새로 창단되어 영남을 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한 계몽운동 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이 그해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통합하여 전국 규모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출범시켰다. 그로부터 3.1운동 이전까지 국내의 독립운동은 대부분 『대한광복회』가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에 군자금을 조달해주는 일도 이들의 몫이 되었다. 총사령 박상진(울산 출생)은 이듬해 서울의 남일여관,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점, 중국 단동의 안동여관 등에 기지를 두고, 서간도의 신흥학교 등 독립군기지와 연락하였다. 비밀조직이어서 정체가 좀처럼 노출되지 않았으나 칠곡의 악질 친일부호(장승원) 처단과 아산의 친일파 도고면장(박용하) 암살사건이후 조직이 일경에 노출되면서 200여명의 단원 중 총사령을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었다. 친일파 처단은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단체가 감행할 수 있었던 최선의 독립투쟁이었지만, 그로 인해 사령, 부사령 등은 처형당하고 조직은 대부분 와해되었다. 채기중도 이때 채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하지만 이들 『대한광복회』 활동은 다음해 거국적으로 일어나는 <3.1만세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만주 등지 <독립운동>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특히 『대한광복회』가 만주에 뿌린 씨앗은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건실한 열매를 맺었다.

조직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대한광복회』에 몸담았던 열사들은 산발적으로 독립운동 및 애국계몽운동에 지속적으로 가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5년 광복이 된 후에도 이들의 정신은 계승되어 「대한광복단」이 재건되었고, 이들이 전개한 역점사업은 국민계몽을 위한 연구교육기관의 설립과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이었다. 그리고 과거 자신들의 독립운동 경험을 기반으로 해방 후 세대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한광복단」 또한 1950년에 발발한 전대미문의 한국전쟁 탓에 다섯 살 박이로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풍기광복단’이 조선국권회복단과 발전적 통합을 이루어 『대한광복회』가 결성되면서 조직은 여러 차례 변천되었고 위기를 겪었지만 국권회복이라는 그 흐름은 중단 없이 추진되었다. 광복 후에 재건된 「대한광복단」 활동으로 후세 사람들에게는 「대한광복단」이라는 명칭이 익숙해졌지만 사실 그 활동의 핵심적 역할은 『대한광복회』의 공로를 간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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