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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232] 동구에 용(龍)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용바우(龍巖)’부석면 용암1리 ‘용바우’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1.30 15:56
  • 호수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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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이씨 예참공파 민도(敏道) 후손 450년 세거지
용바우 전설 “용바우 궁둥이를 우리마을로 돌려라”

용바우 마을전경
용바우 사람들
새두들마을

부석면 용바우 가는 길
부석사로 가는 길목인 소천리 회전교차로에서 봉화방향으로 2km가량 가다보면 망감마을이 나타난다. 여기서 200m쯤 더 가면 도로 우측에 용암1,2리(새두들, 용암, 화감)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우회전하여 산간길로 접어들어 고개 하나 넘으면 왼쪽에 새두들 마을이 보이고, 다시 1km 더 내려가면 용바우 마을이다. 지난 5일 용바우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김진동 이장, 김종원 노인회장, 박종일 노인회부회장, 김형기 노인회총무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용바우의 전설과 마을의 내력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용바우 마을
의상(義相)이 부석사를 창건(676년)할 당시 부석 지역은 고구려의 땅 ‘이벌지현(伊伐支縣)’이었다.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757) 인풍현(隣豊縣)으로 고쳐 급산군(급山郡,옛순흥)에 속하게 했다. 순흥은 고려 때 흥주(興州)-순정(順政) 등으로 부르다가 고려말 순흥부로 승격됐다.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부가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됐다. 

이 무렵 부(府)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신라-고려 때 인풍현(옛부석)에 속해있던 단산지역은 일부석면이 되고, 용암·화부·감곡·성남 지역은 이부석면, 부석사·소천·임곡·노곡 지역은 삼부석면으로 개편됐다. 이 때 용암은 이부석면(二浮石面) 용암리(龍巖里)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다가 1457년 금성대군 사건으로 순흥부가 폐부되어 이부석면은 영천군에 붙었다가 1683년 부가 회복되자 다시 순흥부에 속하게 됐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삼부석면은 봉양면(鳳陽面)으로, 이부석면은 용암면(龍岩面)으로, 일부석면은 단산면(丹山面)으로 개칭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순흥군·풍기군·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합쳐지고, 당시 순흥군 봉양면, 용암면, 도강면(도탄,보계)이 부석면으로 통합됐다. 이 때 영주군 부석면 용암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뚜껑바우

지명유래
용암1리는 용바우, 새두들, 망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용바우 마을은 마을 초입부터 바위가 많다. “용바우가 어디에 있느냐?”고 여쭈니, 김종원 노인회장은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洞口)에 용(龍)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용바우’라 불렀다”며 “이 용바우가 도랑가에 있었는데 농토를 넓히고 길을 새로 내면서 땅에 묻혔는지 지금은 없다. 용바우가 있던 동구 주변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용천봉(龍天峰) 투구암(뚜껑바우)을 비롯하여 건너바위, 칼바위 등 바우가 많다”고 했다. 새두들 마을은 뒷산 언덕에 새들이 많아 ‘새가 사는 언덕’이란 뜻에서 새두들(鳳邱)이라 했다고 한다. 김진동 이장은 “용암1리에는 삽시락골, 갈마골, 장자골, 돌밭골, 갓골, 딱밭골 등 정겨운 지명들이 많다”고 했다.

추원당(追遠堂)

전의이씨 입향 내력
부석 용바우 마을은 전의이씨 집성촌이다. 전의이씨가 용암에 세거하게 된 것은 조선 명종 때 이민도(李敏道,1502-1564)가 영천(옛영주)에 낙향하면서 비롯됐다. 그의 선계(先系)는 세종 때 중추원사(정이품)에 임명된 이정간(李貞幹)의 후손이며,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낸 이수남(李壽男)은 민도의 증조부다. 본래 서울 서소문 반송방(盤松坊)에 살았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때 그 근친들이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단신으로 영천 만방(萬芳,문수면)으로 내려와 숨어살았다. 그 뒤 민도의 손자 덕양(德良,1550生)이 용암(龍巖)으로 옮겨 정착했다. 전의이씨 부석문중 이상우(79. 서울대. 한국투지신탁전무) 종손은 “민도 선조께서 기묘사화 때 영천으로 낙향하셨는데 당시 18살 총각이셨다”며 “만방리(종릉)에 숨어 사시다가 손자 대(代)에 이르러 용암에 입향하셨다고 하니 그 때가 1570년경으로 추정된다. 저의 12대조이신 덕양(용암입향조) 선조의 묘가 용바우에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지금도 용암에 전의이씨가 사느냐?”고 여쭈니, 후손 이순각(77) 씨는 “어릴 적 20여 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7집이 산다”며 “전의이가가 용암에 세거한지 450년쯤 됐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 추원당 앞에 (까치구멍) 종가집이 있었는데 10여 년 전쯤 퇴락하고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문과4장, 고등1장 인물 배출
용바우 마을 북쪽에 추원당(追遠堂,비지정문화재)이 있다. 추원당은 전의인(全義人) 신계(新溪) 이천상(李天相,1637-1708)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건립했다. 이천상은 영주 입향조 이민도의 현손이며, 용암 입향조 덕량의 손자로 성리학·예학에 깊어 가례통해(家禮通解), 성리지남, 성리후설 등 문집과 금강산 유람기 관동록(關東錄)을 남겼다.

그의 아들 성좌(聖佐)는 숙종(1690) 때 문과로 곡성군수를, 손자 광국(光國)이 1715년 문과로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현손 국표(國標)가 정조(1777) 때 문과로 사간원 정원을, 국표의 아들 용민(容敏)이 순조(1819) 때 문과로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또 근세에 와서 천상의 10세손 이정호(李正浩)는 부석공립보통학교 출신으로 해방 후 독학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옥천, 제천, 영주군수를 역임하고 경북도 상공·문정과장을 지냈다.

용바우의 전설
‘용바우’란 지명은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김종원 노인회장은 “먼 옛날 안동권씨와 해주오씨가 용암에 살았다고 한다. 해주오씨는 후손이 없어 재산(1,500평)을 마을에 기증하여 지금도 마을에서 벌초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김형기(76) 노인회총무는 “예전부터 용암과 화감은 비슷한 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오랜 세월 서로 돕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살아왔다”며 용암의 전설을 들려줬다.

「용암의 궁둥이가 자기 동네 쪽으로 돌려져 있어야 용이 먹은 복운이 우리 마을로 들어온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용바우 장정들과 부녀자들이 지렛대와 밧줄을 들고 나와 용바우 궁둥이를 용암 쪽으로 돌려놓는다. 며칠 후 화감 사람들이 몰려와 용암 궁둥이를 화감마을로 돌려놓았다. 해마다 정월이면 ‘용바우 궁둥이 돌리기 행사’가 성황리 열렸다고 전해온다」

용바우공원, 바우글씨

용바우 공원
용바우가 있었다는 동구 주변은 산수 수려하고 기암괴석과 바위글씨도 여럿 있다. 옛 용바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주변 계곡에는 2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반석과 층층바우 등이 있어 장관(壯觀)이다. 용이 승천했다는 용천봉(龍天峰) 위에는 투구를 쓴 장군 모습을 한 바위 3개를 비롯하여 각양각색 바우들이 많다. 또 도로변 바위에는 용와화암(龍臥化巖,은둔선비), 용만화무(龍灣花霧,선비명암), 운행우시(雲行雨施,구름과비) 등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진동 이장은 “용바우 전설이 깃든 이곳에 ‘용암공원’을 만들어 이곳이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임을 세상에 알리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쉼터로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동샘
건너바우, 칼바우
메주 쑤기
용바우 칼국수
정을숙, 이부진, 황화자, 김종필 씨

용바우 사람들
용바우 마을은 사방팔방이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이다. 새두들 뒷산 봉구(鳳邱)에서 발원한 신계(新溪)는 용암-화감들을 풍요롭게 했다. 선대부터 용암에 살았다는 정원대(81) 어르신은 “어릴 적 용암에는 50여 호가 살았으니 아마도 400명은 넘었을 것”이라며 “초가삼간에 식구는 많고, 먹고 살기 힘든 고난의 시대였다”고 말했다.

김성용(73) 씨는 “예전에는 동구 느티나무에 동제(洞祭)를 지냈다”며 “당시 동네사람모두 풍년농사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했다”고 했다. 용암경로당 좌장이신 안부희(86) 할머니는 “18살 때 구혼식을 하고 가마타고 시집왔다”면서 “층층시하에 외시조모까지 모시고 살다보니 10식구가 넘었다. 호된 시집살이를 했다”고 했다. 박종일(82,노인회부회장)·이부진(80) 부부는 “서울 살다가 2013년 용암에 귀농했다”며 “공해 한 점 없는 평안하고 정이 넘치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회관에서 나와 김 이장과 동샘 구경을 갔다. 뒤 따라 온 권중옥(82) 할머니는 “새댁 시절 50여 호 모두 이 물을 먹고 살았다”며 “바우틈에서 샘물이 솟아올랐고, 샘가에는 향나무와 구귀자나무가 심겨져 있었다”고 말했다. 동구 밖 용바우가 있던 곳에 갔다. 칼바우에 올라 김 이장이 건너바우로 건너뛰는 사진도 찍었다. 김 이장은 “바위산에 뚜껑바우가 하나 둘 셋 있는데 장군의 모습을 닮았다”고 했다.

백순행 반장

동네 한 바퀴 둘러보고 회관으로 오는 길에 백순행(62) 반장댁에서 메주 쑤는 과정을 구경했다. 회관에서는 (칼국수) 저녁 준비가 한창이다. 이부진 할머니가 반죽을 하고 정을숙(75) 씨가 홍두깨로 민다. 이동선(82) 할머니는 국수를 삶고, 김종필(80) 할머니는 상을 펴고, 황화자(76) 씨는 국수를 날랐다. 김형기 씨는 “세상에서 가장 정다운 모습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김진동 이장
김종원 노인회장
박종일 노인회부회장
김형기 노인회총무
정원대 어르신
이순각 씨
김성용 씨
안부희 할머니
권중옥 할머니
이동선 할머니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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