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시조시인, 본지논설위원)

갓 스무 살에 교단에 첫발을 내딛으며 동료들로부터 받은 별명이 ‘조달부’였다. 입만 벌리면 남의 부아를 돋운다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 조합이다. 가깝게 지내던 이들 중에는 입만 열면 거짓이라고 ‘조달구’도 있었고, 입만 열면 비비꼬아서 화를 돋운다고 ‘조달피’도 있었다. 모두가 상대적으로 젊었다는 공통점이었다.

지금 도처에 ‘말폭탄’이 널려 있다. 북한과 미국이 그렇고, 여당과 야당이 그러하다. 조롱과 협박에 오가는 가시 돋친 비아냥과 야유가 가히 핵미사일 보다 더 무섭다면 과장일까. 일촉즉발 공포 위에 분위기 모르고 내려앉은 먼지 같은 말들이 쌓인다. 먼지야 털어내면 그만이지만 그걸 쏟아내는 이들에게 나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처지가 가엾다. 이 모든 게 남의 눈 속 티끌은 보면서 제 눈 속 대들보는 느끼지도 못하는 ‘속 편한’ 시력 탓이 아닐까 싶다.

누군들 자기 적폐를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는 않겠다. 우리뿐 아니라 동서고금 인류에게 일침이 되는 선현의 가르침을 보면 알 일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子曰, 己所不欲 勿施於人)”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

“네게 고통을 안겨줄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말라.(힌두교 복음)”

이런 깨우침은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도 실천이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래도록 그런 교훈조차 갖지 못했다. 항상 사전에 막지 못하고 사후에 혀를 차는 자조(自嘲)만 남았으니 여야가 따로 없고 좌우가 동색(同色)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유행이다.

어제까지 자기가 하던 걸 오늘 남이 한다고 거품을 물다 못 해 감정이 상해 고소·고발 전쟁으로 번진다. 정권의 방향에 따라 한쪽에선 청산해야 할 적폐요, 다른 쪽에선 더러운 정치보복이 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거의 모든 현직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서서 보내는 여일이 속만 시끄러울 뿐이다. 매사가 그렇지만 그런 구태의 극복 또한 마음먹기에 달렸지 않을까. 불교방송을 들으면 ‘耳目苦, 이목고’하는 큰스님 법문이 주옥같다. 철학박사 지인이 그런다. “적폐에도 좌우가 있다.”고. 그러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좌파의 적폐는 좌파가, 우파의 적폐는 우파가 청산해야 한다”는 말을 곁들인다. 자기들은 인정하지 않으나 현 정부는 좌파 정부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맞닿아서 보통 국민들에게도 와 닿는다. 한 번 고용하면 아무리 일 못하고 조직 분위기를 해쳐도 해고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떤 기업이 모든 직원을 정규직으로 돌릴까. 기업 생산성이 떨어져도 임금은 올려야 하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알바 시장’을 떠도는 현실이 여기서 출발했지 않은가. 이런 걸 우파 정권에서 개혁하려 했으니 엄청난 저항에 실패가 따랐던 것이다. 현 정부가 전 정권의 ‘적폐’라고 폐기할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지지 기반인 노동계를 설득해서 진정한 노동개혁의 첫발을 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신화를 일군 과정을 살폈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파 정권이 해야 할 일도 국정교과서나 건국절 제정이 아니었다. 차라리 복지를 손봤어야 했다. 한정된 자원이지만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힘써야 했다. 마찬가지로 야권의 협조를 얻었을 테고, 지금 정권의 ‘퍼주기 복지’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을 터다. 정권을 내놓은 뒤에도 그 이유가 됐던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처절하게 감내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서 비판만 늘어놓으니 공허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파건 우파건, 여당이건 야당이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뭔가를 기여하고자 정치에 뜻을 품었을 터다. 그렇다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왼쪽과 오른쪽 주머니 속에 손을 깊숙이 넣어 나 자신의 적폐부터 살핀 다음 하나씩 꺼내 내던져야 한다. 인생 40은 불혹이라 했다. 50을 지천명이라고 하는 까닭도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인제 필자는 비로소 만사가 하늘의 뜻이란 걸 이해한다. 무엇이든 ‘선의로 출발해서 사익으로 귀결되므로 악평만 남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아직 때로는 ‘조달부’의 버릇이 남아 장미의 가시같이 날카롭지는 않으나 울퉁불퉁한 옹이만 잔뜩 웅크린 고목으로 살고 있다는 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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