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부석사의 오불회괘불탱(보물 제1562호)

괘불(掛佛)은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할 때 법당 밖에 임시로 설법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 단, 즉 야단법석(野壇法席) 때 걸기 위해 제작한 대형 불화로,〈부석사 괘불〉은 현존하는 괘불 중에서도 시대가 올라가는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펼친 높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이 괘불은 70여 명의 인물이 정연하게 자리한 대규모의 설법모임을 보여준다.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기 위해 영축산(靈鷲山)에 모여든 청중의 모습을 부석사 괘불의 중심 장면으로 할애하여 장대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나 설법회 너머로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는 부처를 대표하는 세 부처를 또 다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그림의 특징이다. 무수히 많으면서도 사실은 하나인 조선 사람들의 부처에 대한 사고는 부석사 괘불을 통해 훌륭하게 도해되고 있다.

부석사에서는 괘불을 두 점 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괘불제작에는 많은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사찰에서 여러 점의 괘불을 조성한 사례가 별로 없으며, 낡으면 2, 3차에 걸쳐 중수하여 다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그러나 부석사는 60년 차이로 괘불 2점을 그리는 야단법석을 떤 셈이다. 한 점은 1684년에 제작하여 사용해 오다가 1745년 수리하여 청풍현(現 제천)신륵사로 보내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괘불이고, 또 한 점은 부석사가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1745년 작 괘불(보물 제1562호)이다.

쌍둥이격의 두 괘불이 남아 있기에 이야기 거리가 된다. 같은 형식의 괘불이 두 개를 만든 것은 아마 부석사가 최초일 것이다. 당초의 1684년 작 괘불은 네 부처가 등장하는 사불회괘불탱이었다. 1745년 작 괘불은 여기에다 1부처를 추가하여 오불회괘불탱으로 만들었다.

부석사의 괘불에는 화엄종찰에 걸맞게 다수의 부처가 등장한다. 조선말기의 괘불 형식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만 크게 그리는 게 보통인데 여기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 부석사 괘불의 특징인 것이다.

부석사의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은 1745년에 새로 조성된 오불회도 형식의 괘불로서, 1684년 먼저 작성된 괘불의 도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노사나불을 새롭게 첨가하였다. 즉 가로축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삼세불(三世佛 -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세로축으로는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三身佛 -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배치하는 구도인데, 삼세·삼신의 오불회(6불 중 주불인 석가모니불이 겹치므로 5불이 됨)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중심은 당연히 영산회상의 설주인 석가모니불이 된다.

이와 같은 삼신·삼세불화 형식은 조선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 정착한 도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오불회 형식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단행된 종단의 통폐합에 따른 삼신불, 삼세불 사상의 결합으로 나타난 도상으로, 부석사 괘불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대형의 군도형식의 불화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인물묘사에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는 등 18세기 중반경의 격조 높은 불화양식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부석사의 오불회괘불탱(1745년)은 이러한 구도를 기본으로, 사천왕, 보살들로 둘러싸여 있는 석가불의 대좌 앞에 화불처럼 작은 노사나불입상을 첨가하였다. 즉 삼신·삼세불이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형태는 1684년 괘불탱과 비교하여 다소 위축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중간 색조의 적색·녹색 등에 간혹 금니(金泥)를 사용하여 화사하고 맑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화면 밖 테두리는 잎과 줄기로 장식한 원 안의 범자(梵字)를 넝쿨처럼 붉은 선으로 연결하여 화면이 한층 돋보이게 처리하였다. 삼신·삼세불이 융합된 오불·사불·삼불 등 다불(多佛)형식의 불화는 16세기 일본 주륜지(十輪寺)소장 오불회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17〜18세기에 절정을 이루다가 점차 사라졌다. 17〜18세기 괘불탱 중에는 부석사 오불회괘불탱(1745년)과 사불회괘불탱(1684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기도 칠장사 오불회괘불탱(1628년), 삼불회괘불탱(1710년) 등이 남아있다. 선종과 교종이 통합된 조선시대 통불교사상(通佛敎思想)에 따라 대두된 삼신·삼세불화는 불(佛)의 영원성을 내포한 새로운 도상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전란과 화재로부터 살아남은 두 점의 부석사 괘불은 우리에게 과거의 신앙과 교리, 괘불 제작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새로 불화를 조성할 때 과거의 도상을 답습하는가? 혹은 당시의 필요에 따라 전적으로 다른 도상의 괘불을 제작하는가?

60년 전과 후는 어떤 면에서 서로 닮았고, 어떤 면에서 서로 다른가? 신륵사로 가는 길은 그 옛날 얼마나 되는 거리였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괘불을 옮길 결심을 했을까? 이런 잡스런 생각들을…. 괘불은 두루마리로 말아도 무게가 만만치 않아 장정 여럿이 야단법석을 떨어야 겨우 옮길 수 있는 물건이고, 길이 또한 길어서 운반하기가 만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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