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수필가. 시조시인, 본지논설위원)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철이 다가 왔다. 시장 통을 지나가다보니 난전에서 도라지를 깎아 파는 아주머니의 점심밥상이 눈에 들어 왔다. 깎다 둔 도라지위에 올려놓은 김치사발에 고춧가루가 오다가다 묻은 갓 무친 김치가 반찬이라고는 전부이다. 원래 김장을 섞는 날은 갓 무친 김치 외에는 반찬이 필요 없기는 하다.

유명한 어느 학자가 과거를 회상하던 말이 떠 떠올랐다. 김장철에 그의 모친이 시장거리를 오르내리면서 남들이 버린 배추 겉잎을 주워 모으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이유를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김장김치가 되었더라는 말이다. 말하는 이도 목이 메고 듣는 이도 숙연해지는 우리의 옛 주소였다.

배춧잎을 주워서 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도 참 유별난 김장을 했던 옛 기억이 있다. 겨울에 야채가 귀하던 시절이라 김장을 한 접씩이나 했다. 한 접은 백포기를 말하는데 달구지로 아름드리 배추를 끌고 와 마당에 부려 놓으면 작은 산 같이 높게 보였다. 지금처럼 큰 그릇도 흔하지 않던 때, 커다란 단지까지 동원되어 배추를 절이고 꺼내 씻고 했으니 여간 골물이 아니었다. 단지에서 절인 배추를 꺼낼 때 바닥에 남아있는 것을 꺼내려면 머리가 단지 속으로 들어가는 풍경도 벌어졌다. 허당 같은 마당에서 더운 물도 귀하고 연장도 귀하던 그 시절 11월은 왜 그렇게 추웠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혼자가 되신 고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고모님을 시어머니 모시듯 하여 아버지와 고모님께서 드실 김치와 나머지 식구가 먹는 김치를 따로 담았다. 일단 못 쓴다고 깔려 낸 배춧잎을 다시 다듬어 상한 부분을 잘라내고 무를 큼직하게 썰어서 함께 버무렸는데 이것은 고춧가루가 적을 뿐더러 엄청 짰다. 그래서인지 우리 지방에서는 김치를 짠지라고 불렀다.

배추김치만 짠지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고추짠지, 무짠지, 곤짠지, 속세짠지 등으로 불렀고 이렇게 허드레기 나물로 대강 버무린 김치를 막 짠지라고 했다. 짜게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짜지 않고는 겨울을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짜거나 말거나 백포기 짠지는 봄이 오기 전에 동이 났다. 아니 동이 나야했다.

냉장고가 이름조차 없던 시절, 김칫독은 땅에다 묻을 수밖에 없었다.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김칫독을 묻는 작업을 했다. 옹이 빠진 판자 담장 아래에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단지를 묻은 다음, 혹여 단지 속으로 모래가 튀어 들어갈까 쌀가마니 양쪽 옆을 타서 단지 입구만큼 구멍을 뚫어 덮는다. 그러면 뚫린 구멍마다 단지가 목을 올려놓는 풍경이 생겨난다. 노란 쌀가마니 위로 김치독이 크고 작은 뚜껑을 덮고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눈 온 날 담장 밑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마냥 사랑스러웠다. 보고 있자면 겨울나기가 거뜬할 것 같았고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었다.

우리 집에서 두 층의 짠지를 담았던 것은 보나마나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적은 돈으로 짠지 양을 채우려고 깔려 낸 잎을 다시 다듬어 짠지로 만들었으니 가계가 넉넉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어릴 때도 어머니의 계산을 알았지만 그래도 김장을 하고나면 기분이 좋았던 것은 당시에는 김장을 하지 못하는 집도 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막 짠지라고 불평하거나 내치지도 않았고, 된장과 막 짠지만 얹힌 밥상 앞에서도 참 만족했었다.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풍속도 많이 변했다. 지금은 김치를 전혀 담그지 않는 집도 있고, 담근다 하더라도 열 포기 내외로 담그는 집이 많아졌다. 예전처럼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외에도 먹을 반찬이 넘쳐나서 김치를 외면하는 풍요의 시절이 온 것이다.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있어 짜게 하지 않으며, 짜게 하지 않으니 짠지란 말도 사라졌고 막 짠지란 김치도 자연스레 없어져버렸다.

도라지 파는 아주머니의 허름한 밥상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배추겉껍질로 담은 옛날 막 짠지가 생각난다. 고춧가루도 마늘도 약한 막 짠지. 요즘의 아이들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쿰하게 익은 짠지 잎을 식은 밥 한 술에 폭 덮어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난다. 푸르고 질긴 잎에서 씹을수록 나는 고소한 맛이 입에서 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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