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2, 전 영주문화원이사)

영주는 소백산아래 비옥한 땅과 풍광이 수려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선비의 고장이다. 다만 우기가 되면 서천(西川)과 원당천(元塘川)이 범람하여 작물과 일상생활에 피해가 따랐다.

1942년 4월 1일 중앙선 개통 전에 영주 주민들의 주거실태를 살펴보면, 두서(杜西. 영광중학 부근)일대와 제일교회 부근, 시의회 부근, 사례(砂禮. 향교, 안양사, 영주여고 밑)와 동산교회부근, 보름골, 원당(元塘. 코오롱 아파트 부근, 하망동사무소 부근) 일대, 광승(廣升) 일대, 지천(芝川. 시청서편) 일대, 귀산(龜山)아래 등 습한 곳을 피하여 양지바른 곳에 촌락을 형성하고 살았다. 1920년대 말 영주 인구는 4,340명(일본인 104명, 중국인 50명)이었다고 하니 규모가 작은 고을이었다.(경북영선지 참조)

중앙선 개통 전에는 서천과 원당천의 제방이 너무 부실하여 주민들은 항상 수해에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나 중앙선이 개통된 이후 철길보호가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에 서천의 제방은 특별관리가 되고 있었다. 영주의 지명을 살펴보면 휴(休)자와 천(川)자가 많은데 모두가 물(水)과 관계가 있는 글자이다.

원당천은 동쪽의 삽재 부근에서 내려오는 개천과 동북쪽인 조와리 방면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보름골에서 합수되어 시가지 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다가 가흥교 위에서 서천으로 유입되던 제법 규모가 큰 개천이다. 평소에는 수량이 많지 않지만 폭우가 내리거나 장마 때가 되면 하상이 높아서 물이 넘치고 수로가 막혀서 농경지와 시가지에 자주 물난리를 겪게 만들었다.

서천은 1961년 영주 대수해 때 가흥동(한절마을)뒷산인 구수산 동쪽 끝자락(지금의 폭포)을 절단하여 물길을 서편으로 완전히 돌렸기 때문에 수해걱정이 해결되었다.

그러나 원당천은 아무런 대책 없이 오늘까지 이어지니 주민들의 마음은 항상 불안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원당천이 영주사람들로부터 밉상의 대상이거나 천덕꾸러기만은 아니었다.

원당천은 영주사람들의 낭만과 휴식의 공간이었으며 약속의 장소이었다. 여름철이면 개구쟁이들이 모여서 목욕을 하고 물놀이를 하면서 천진난만하게 꿈을 키우던 장소기도 하였다. 무더운 여름에는 저녁을 먹고 식구들과 제방에 돗자리를 깔고 강바람을 쏘이며 밤하늘에 별을 헤아리던 추억어린 장소였으며 청춘남여들의 date장소이기도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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