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28] 안정면 오계2리 ‘보치골’

1600년경 인동장씨·단양우씨 입향, 집성촌
뒷산 꿀밤나무, 앞냇가 버드나무 산수 전원

보치골 전경

 

안정면 보치골 가는 길
영주 서천교 건너 서부사거리에서 창진리 방향으로 간다. 창진삼거리에서 슈퍼 우측길로 접어들어 창진고개 넘으면 오계2리 보치골이다. 창진리와 보치골 사이로 중앙선 복선전철이 통과하게 되어 지금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지난 9일 보치골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손정달 이장, 우성박 노인회장, 정순자 부녀회장, 우성구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보치골 큰샘

 

고향집 골목길

역사 속의 보치골
안정면 안심리, 오계리, 동촌리 지역은 조선시대 때 풍기군(豊基郡)에 속했다. 풍기는 통일신라 때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 1413년(태종13년) 기천현(基川縣)이 됐다가 1450년 풍기군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1700년)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보치골 지역은 풍기군 동촌면(東村面) 배치동리(杯致洞里)가 됐다.  

그 후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동촌면 배치동(杯致洞)으로 바뀌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폐합하고, 풍기군에 속해 있던 동촌면, 생현면, 용산면을 안정면(安定面)으로 통합했다. 또 풍기군 동촌면의 배치동과 오산동(梧山洞)을 합쳐 오계동(梧溪洞)이라 하고 안정면에 편입시켰다. 1980년 영풍군 안정면 오계2리, 1995년 영주시 안정면 오계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치골의 유래
지명유래총람, 풍기지 등에 보면 이곳 지명이 보치골(保致谷) 또는 배치골(杯致谷·盃致谷)이라고 나온다.

‘보치골’이란 「예전에 남치송(南致松)이라는 선비가 다래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할 때 뒷산에 보추나무(상수리·꿀밤나무)가 많아 ‘보추골’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보치골’이 됐다. 그 후 이곳 선비들이 순수한 한글 ‘보치골’에 한자어 붙이다 보니 보치골(保致谷)이 됐다」고 적었다. [참고:예전에 소백산·태백산 지역에서는 꿀밤나무를 ‘보추나무’라 불렀다] 또 조선 중기 무렵 발간된 풍기지(豊基誌)에 보면 「풍기군 동촌면(東村面) 배치동리(杯致洞里)」로 기록했다. 이는 순수한 한글 ‘보치’에 어울리는 한자를 붙이다 보니 ‘杯致(배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한문밖에 없었다. 한글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ㄱ:기역” “ㄴ:니은”이라 읽고, 글자로 적을 때는 「其役, 尼隱」이라 쓴 것과 같이 당시 ‘보치’를 ‘保致’ 또는 ‘杯致’로 적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우성박 노인회장은 “어릴 적 ‘보치나무가 무성하여 보치골라 했다’고 들었는데 보치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몰랐는데 이번에 꿀밤나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뒷산에 꿀밤나무가 빽빽하다”고 말했다.

인동장씨 입향 내력

장석광 씨

보치골의 인동장씨는 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1세조) 下, 6세 현감공 안양(安良) 下, 7세 경손(敬孫,1436-1486,장말손의형) 下, 11세 주부공(主簿公) 일한(壹翰,주부공파조)으로 세계를 이어온 ‘주부공파’이다. 주부공은 원래 문경에 살았는데 1600년경 주부공의 손자 대(13세)에 이르러 그 일족이 보치골로 이거하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주부공파 후손 장명규(57,양산시,25세) 씨는 “저의 8대조 윤택(潤宅,17세,1768-1836), 7대조 해구(海矩)18세, 6대조 진영(鎭永,19세) 할아버지께서 보치골에 사셨다는 것은 확인되고 있으나 그 윗대(9-12대) 선조의 내력은 알 수 없다”며 “선대 어르신들에 의하면 13대조 할아버지쯤에서 보치골에 입향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후손 장석광(75) 씨는 “인동장가가 보치골에 입향한지 420년이 됐다”며 “1960년대에는 보치골에 30여 가구, 오계에 2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3집이 살고 있다”고 했다.

단양우씨 집성촌 보치골

우태진 주손

영주의 단영우씨는 문희공파(文僖公派)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현손 우숭려(禹崇呂1297-1367)가 고려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낙남하여 영천(옛영주)의 동쪽 용암대(영주고 근처)에 터를 잡았다. 단양우씨 보치골문중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우태진(77,32세손,하망동) 주손을 찾아갔다.

우 주손은 세보를 보여주면서 “보치골의 단양우씨는 21세 흥도(興道,1581-1619) 선조께서 1600년경 용암대에서 반지미(盤山)를 거쳐 보치골로 이거하여 새 터전을 마련하셨다”며 “학문을 중시했던 보치골문중은 입향조 흥도 선조에서 22세 형규(衡圭), 23세 성하(成夏)로 이어오다가 입향조의 증손인 상철(尙喆,24세,1705-1734) 할아버지께서 통정대부에 오르는 등 크게 학문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이 마을 후손 우성박(76) 씨는 “상철 할아버지는 아드님 4형제(東聲,東흘,東穆,東契) 분을 두셨는데 그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1950-60년대 60여 세대가 사는 집성촌을 이루었다”며 “단양우가가 보치골에 세거한지 400년이 넘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직장따라 학업따라 도시로 나가고 지금은 20여 가구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단양우씨 尙喆 선조 제단

마을의 형성과 성장
아주 옛날 남치송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한다. 인동장씨와 단양우씨가 입향하기 전일이다. 마을 앞에는 소백산 원적봉에서 발원한 홍교천이 흐르고, 마을 뒤로는 야트막한 보치산 능선이 북서풍을 막아주어 아득한 느낌을 준다.

이 마을 우성구(86) 어르신은 “마을 안 쪽에 큰샘이 있다. 아주 옛날 마을이 처음 열릴 때 이 샘을 중심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면서 “마을에 샘이 하나뿐. 모두 이 물을 먹고 살았는데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물버지기가 줄을 이었다”고 말했다.

우성박(76) 노인회장은 “인동장씨와 단양우씨가 들어와 세거하기 시작한 후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해방 후에는 10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로 성장했다”며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는 새마을시대(1970)를 기점으로 농촌 인구가 급속 줄었다. 지금은 60여 세대에 100여명이 산다”고 말했다.

 

박미선, 박정락, 박순애, 권기매 씨

 

우숙희, 손필원, 김섭이 씨

 

버드나무 십리길

 

보치골 사람들

권영대 씨

보치골의 자랑은 크고 높은(높이4m) 마을 표석일 듯싶다. 이 마을 권영대(67) 씨는 “2014년 보치골 출신 벗우회원 24명이 애향심(성금)을 모아 ‘마을표석’을 건립했다”고 말했다.

마을의 자랑을 여쭈었더니 손정달 이장은 “마을 뒷산에는 소나무, 꿀밤나무가 울창하고 마을 앞 시냇가에는 늙은 버드나무가 십리길 숲을 이루고 있어 산수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이날 경로당에서 연세가 제일 높으신 박갑연(80) 할머니는 “매일 회관에 오는 재미로 산다”며 “새댁시절 종일 물 여다 먹고, 불 때 밥해먹던 시절이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이 늙은이를 찾아 와 사진을 찍어주니 고맙다”고 했다. 권순남(74) 노인회부회장은 “보치골은 예로부터 산 좋고 물이 좋아 장수하는 마을로 알려졌다. 80을 넘긴 어르신들 모두 꼿꼿하고 정정하시다. 만수무강이 보치골의 자랑”이라고 했다. 정순자(71) 부녀회장은 “현대 농촌 특성상 노인이 노인을 봉양하는 시대가 됐다”며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60-70대 새댁네들이 80-90대 어르신들을 성심껏 모신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해방 후 풍기 향교마을에서 자랐다는 권광자(79) 할머니는 “회관이 좋네! 참 좋네! 우리 싸우지 말고 흉보지 말고, 칭찬하고 자랑만 하면서 살아보세!”라고 노래하듯 한 말씀하신 후 “이장님과 노인회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셔서 모두 따듯하고 편안하게 산다”고 말했다. 평은리가 고향인 권경옥(79) 할머니는 “예전에는 모두 먹고사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지금 좋은 세상을 만나 호강하며 살고 있다. 마을 새댁네들이 잘 해 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어른을 잘 모시는 게 집성촌의 범절”이라고 말했다.

옛 까치구멍집

천옥희(70) 씨는 “보치골은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고, 뒷산 골짝마다 농경지가 많아 예로부터 풍요로운 마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예천 보문에서 시집와 47년 살았다는 여정자(67)씨는 “그 때는 모두 초가집에 살았고, 버지기로 물길어 물두멍에 붓고, 거렁에서 빨래했다”며 “남편이 훅지(쟁기)로 논갈이할 때는 아이업고 소여물 이고 논에 가서 논두렁에서 들밥 먹는 시대를 살았다”고 말했다. 늦은 밤 물긷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손필원(65) 씨, 고단한 삶을 살아오신 박정락(86) 할머니, 마을의 풍속과 현대 이야기를 들려주신 김섭이·우숙희·박순애·권기매·박미선 새댁님들께 감사드리며, 동내한바퀴 돌면서 큰샘, 까치구멍집, 선조제단 등을 안내해 주신 우성박 노인회장님께 고마움을 표한다.
 

손정달 이장
우성박 노인회장
권순남 노인회부회장
정순자 부녀회장
우성구 어르신
박갑연 할머니
권광자 할머니
권경옥 할머니
천옥희 씨
여정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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