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27]단산면 단곡1리 ‘질막’

단곡 곽진이 산수를 벗삼아 독서하고 시를 읊던 곳
산과 구름과 자연의 향기가 진동하는 산수전원마을

질막 마을 전경
곽진의 은행나무

단산면 질막 가는 길
질막 마을은 단산면사무소에서 순흥 방향 2km 지점에 있다. 영주 서천교사거리에서 귀내-장수고개-동촌을 지나 순흥으로 간다. 소수서원-선비촌-삼막교차로-까치재이(鵲峴)를 지나 느티재를 넘으면 단곡1리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인다. 지난 3일 질막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김성년 이장, 강승부 노인회장, 김한상(북영주새마을금고) 이사장, 김경희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단곡1리 마을회관

역사 속의 단곡리(질막)
단곡리 지역은 오랜 세월 순흥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순흥은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라 했고, 통일신라 때 급산군, 고려초 때 흥주(興州)-순정(順政)-흥령-순흥부(順興府)로 바뀌었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승격됐다. 이 무렵 부(府)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단곡리 지역은 순흥도호부 1부석면(一浮石面) 단곡리(丹谷里)가 됐고, 세조 3년(1457) 금성대군변으로 폐부되어 풍기군에 속했다가 1683년 순흥부로 회복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순흥부가 경상북도 순흥군으로 바뀌면서 1부석면이 단산면으로 개칭되고, 단곡리가 남목리(안남), 상단곡리(웃질막), 하단곡리(질막)로 분리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동원면이 단산면에 흡수 통합됐다. 이 때 하단곡은 단곡1리, 남목은 단곡2리, 상단곡은 단곡3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성년(59) 이장은 “단곡1리는 1960-70년대 105가구에 700여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농촌인구가 급감했다”며 “현재는 70여호에 150명이 산다”고 말했다.

진막(陳幕)에서 유래한 ‘질막’
마을 앞 표석에 진막의 유래가 잘 나타나 있다. 표석에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 시 군영(軍營) 진막(陣幕,군사용천막)이 있던 곳」이라며 「앞산에 무기고가 있었다 하여 병장산(兵藏山)이라 했다」고 적었다. 삼국사기를 근거로 한 ‘영주의 역사(崔賢,2003)’란 책에 수록된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사를 보면 「고구려군이 장수왕 69년(481) 순흥에 이르렀다. 장수왕 77년(489) 고구려군이 과현(戈峴,장수고개)을 넘었다. 소지왕(신라21대왕) 11년(489) 가을 9월 고구려가 신라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에 이르렀다. 의상이 고구려 잔존 세력을 몰라내고 676년 부석사를 창건했다. 의상은 죽령, 고치령, 마구령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등은 ‘진막(陣幕)’과 관련이 있는 기록이다. 이 마을 이경구(83) 어르신은 “예전에 이곳에 진막이 있어 ‘진막’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질막’이 됐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곽진 선생 묘

단곡(丹谷)과 단산(丹山)
‘단곡’이란 지명은 순흥도호부의 행정구역을 면리로 정비할 때 ‘단곡리’라 했다. 또 김응조(金應祖)가 쓴 곽진의 묘갈명(墓碣銘)에 “1603년 단곡산(丹谷山)으로 들어가 스스로 ‘단곡처사(丹谷居士)’라 하며, 자신의 호(號)를 단곡(丹谷)이라 했다”고 썼다.

위에서 곽진이 단곡에 살면서 호를 ‘단곡’이라 했는지, 후일 그의 호를 따 ‘단곡’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보통 자신이 살던 고향마을을 호(號)로 썼던 예로 봤을 때 곽진이 단곡에 들어가 살면서 호를 단곡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산’이란 지명은 1896년 조선말(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새로 생겼다. 당시 이곳 선비들이 소수서원에 모여 행정구역에 대한 논의를 했다. 논의에서 「소수서원 원장을 지내고 영남 오현의 한 분인 단곡(丹谷) 곽진이 살던 마을 단곡에서 단(丹)자를 따고, 대구도호부사를 지내고 소수서원 원장에 추대된 서현(西峴) 김구정(金九鼎,1559~1638)의 마을 병산(屛山,바우)에서 산(山)자를 따 단산(丹山)이라 정했다」고 한다.

단곡 곽진은 누구인가?
질막 사람들은 곽진(郭진,1568-1633)을 ‘곽 단곡(丹谷) 선생’이라 부르면서 마을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하고 있다. 당시 곽진은 영주지역을 대표하는 처사(處士)이자 공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본관은 현풍(玄風), 호는 단곡(丹谷)이다. 아버지는 생원 곽한(郭瀚)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1568년 풍기 고로촌(서부3리)에서 태어났다. 인동장씨 수희(壽禧,호:果齋)의 딸에 장가들어 2남(장남玹:진사-손자:再亨·再甄·再完/차남瓔:진사-손자:再預) 3녀(1女:琴?,2녀:權定吾,3녀:李文烱)를 두었다. 곽진의 장인 장수희는 퇴계의 문도이면서, 퇴계의 처(허씨부인) 이종사촌이기도 하다.

이 마을 김한상 씨는 “단곡 선생은 23세이던 1590년부터 백운동서원에 출입하여 34세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41세(1608년)에 원장을 역임하고, 48세(1615년)에 다시 원장을 역임하면서 근사록(近思錄), 주서절요(朱書節要) 등을 강론하면서 서원을 보수하고 나무를 심었다고 원지(院誌)에 나온다”면서 “그의 높은 학문을 배우고자 원근 유생들이 다투어 단곡으로 몰려들었는데,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 터가 지금도 ‘서당골’로 남아있다”고 했다.

단곡반석

산수전원(山水田園) 단곡마을
조보양(趙普陽)이 쓴 곽진의 행장(行狀)에 보면 「1603년 시속에 맞지 않아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단곡산으로 들어갔다.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시를 읊고 배회했다. 산수전원의 흥취와 처사적 한적미(閑寂美)가 잘 드러난 시를 많이 섰다」고 했다.

이렇듯 단곡계곡은 산수전원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었다. 어느날 곽진이 백운동서원에서 단곡으로 돌아오는 길에 감회를 표현한 시가 있어 소개한다. 제목은 ‘自白雲洞還丹谷(자백운동환단곡’이다. 「三尺吟공渡一溪/삼척음공도일계(조그마한 지팡이로 시내를 건너니), 白雲深處有茅齋/백운심처유모재(흰구름 깊은 곳에 띠집이 있구나), 從前已識衣歸地/종전이식의귀지(전부터 이미 의탁했던 곳임을 알았기에), 日晩還來路不迷/일만환래로불미(저물녘 돌아와도 길이 헷갈리지 않네.)」 강승부(80) 노인회장은 “마을 앞에서 상단곡을 거쳐 두레골에 이르는 계곡의 운치가 죽계계곡과 함께 소백 제1경”이라며 “특히 단곡 선생이 시를 읊고 즐겼다는 단곡반석은 그 중 제1경”이라고 말했다. 임일곤(80) 어르신은 “단곡 선생이 시를 읊던 단곡계곡은 구비마다 절경”이라며 “아름다운 단곡계곡을 잘 보존하기 위해 단곡사람들은 많이 자제(自制)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한상 이사장은 “지금 공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웃질막 뒤산에 있는 공의 묘소와 공이 심은 은행나무 한 그루, 공의 아들 묘로 추정되는 묘 2기가 앞산에 있다”며 “후손이 없어 외손(奉化琴氏)이 묘를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

큰샘
경로당 사람들
질막 사람들
김봉호·서정한·임운곤 씨

질막 사람들
동구(洞口)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마을의 상징이자 마을의 역사다. 단곡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선생이 입향하던 해에 심었다면 수령이 415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은행나무 뒤쪽 비스듬한 경사면에 집들이 자리 잡았다. 집들은 새마을시대 때 그 모습을 간직한 한옥기와집이 많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골조는 그 때 그대로인 듯하다.

질막 사람들은 2007년 동구에 마을표석을 새로 세우고, 은행나무 아래 행루정(杏樓亭)을 지어 자랑스런 마을의 역사를 기념하고자 했다. 은행나무에서 100m쯤 올라가면 마을회관이 있고, 100여m 더 올라가면 큰샘이 있다. 김경희(97) 할머니는 “예전에 마을 사람들 모두 큰샘 물을 길어다 먹고 살았다”며 “물이 귀해 종일 물을 여다 날랐고, 김장도 샘가에서 절이고, 빨래도 샘가에서 했다”고 말했다.

김영교 씨

마을회관 안방에서 김영교(73)·김기연(73) 씨를 만났다. “마을회관이 있어 참 좋다”며 “매일 30여명이 모여 여러 편으로 나눠 화투도 치고 윷도 논다. 회관은 어르신들끼리 서로서로 돌보고 챙겨 주는 따뜻한 사랑방”이라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 단곡에 터 잡았다는 권학구(81) 어르신은 “이사를 29번 하고 풀빵장사, 안경장사, 사우디·이라크도 갔다 왔다”면서 “이제 산좋고 물좋고 인심좋은 단곡에서 산수를 즐기며 조용히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천명석(85) 어르신은 “50년 전 태백에서 단곡으로 왔다”며 “전에는 인삼농사를 많이 했으나 지금은 포도·사과 농사가 제일 많다”고 했다.

임운곤(77) 씨는 “곽 단곡 선생 사후(死後) 외손 봉화금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300여 년간 세거해 왔다. 1800년대 이후 밀양박씨, 울진임씨, 안동김씨, 충주최씨 등 여러 성씨들이 단란한 마을을 이루어 산다”고 말했다. 왕산(王山)의 내력을 설명해 주신 김봉호(67) 씨, 마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들려주신 서정한(77)씨 께도 감사드린다.
 

김성년 이장
강승부 노인회장
김한상 이사장
김경희 할머니
천명석 어르신
이경구 어르신
권학구 어르신
임일곤 어르신
임운곤 씨
김기연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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