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고지도에 나타난 양백지간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희고, 높고, 신령스러운 산을‘밝은 산[白山]’이라 하였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크게 밝은 산’이<한밝뫼> 즉 태백산(太白山)인 것이다. 따라서 키가 좀 낮긴 하지만 치마폭으로 주위를 부드럽게 감싼 모습의 소백산(小白山)은 그 다음으로 신령한‘밝은 산[白山]’에 속하지 않을까?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태백산(太白山), 노백산(老白山), 장백산(長白山)등으로도 부르는데, 모두‘밝은 산[白山]’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 태백산, 소백산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한밝달’은‘한백달→한배달’로 전음(轉音)되어‘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이름이 되기도 했다.

태백산(太白山:1567m)은 고대부터 천제(天祭)를 지내온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강원도 삼척시·태백시·정선군 및 경북 봉화군에 걸쳐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명산이다.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형성하며 큰 덩치를 지니고 주변 지역 모든 산의 큰 어른처럼 자리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봉화조에 의하면,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라는 표현이 있단다.

또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의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의 각화사(覺華寺), 영주의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이 하나같이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서 태백산의 소재처를 내이군(奈已郡, 현 영주)이라 언급하고 있는 것과, 『여지승람』에서 안동·봉화 및 삼척의 관내 지역 산으로서 태백산을 언급하고 있는 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속설에 의하면, 태백산신은 단종대왕이라고 한다. 영월에서 승하한 단종의 혼령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들어와 산신이 되었으며, 삼척·영월·봉화 등지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현몽하였다고 한다. 영산의 이미지를 더해주는 대목이다.

정감록(鄭鑑錄)에서는 비결서 전체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보신보명(保身保命)의 이상향으로 양백지간(兩白之間)을 꼽고 있다. 양백(兩白)이란 태백과 소백 그 사이를 말하는데, 직선거리로는100여리 정도의 공간이 이에 속한다.

또 정감록에는 「求穀種於三豊」(구곡종어삼풍), 「求人種於兩白」(구인종어양백)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곡식종자를 구하려면 삼풍에 가야하고, 사람의 씨(종자)를 구하려면 양백에 가야한다’는 말로, 즉‘풍자가 든 풍기, 의풍, 무풍이 곡식 종자가 가장 잘 갈무리될 수 있는 곳이며, 태소백 양백지간이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 된다.

그 중 양백지간의 북쪽은 산이 험준하고 골이 좁아 사람이 살 만한 터전이 별로 없는데 반해, 양백의 남쪽은 산들은 유순하고 수려하며 골과 골 사이로 널찍한 들이 곳곳에 끼여 있어, 사람들이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고을이 많다.

특히 소백산 아래 풍기 땅은 난세에 환란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 중에서 최고의 복지(福地)라고 알려져 있으며, 천재지변도 이곳을 피해가기 때문에 흉년이 없는 풍요로운 땅으로 꼽는다. 따라서 정감록 신봉자들이 소백산 비로봉 아래로 스며들어‘정감록촌’을 이루었다. 삼재팔난을 피해 숨어 들어온 이들이 사는 땅 이곳은 예부터 오지 중의 오지여서 인간의 흔적들이 거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 북괴군1개 사단이 끝까지 숨어 주둔했다는 에피소드가 생겨나기도 했다.

주자학이 조선왕조체제를 유지하는 국교(國敎)였다면, 양백은 태백과 소백이 합기합수(合氣合水)하는 조화의 땅으로서 두 기운이 합하여 음(ㅡ)양(ㅣ)의 결합(十)을 이루는 십승지(十勝地)이다. 등줄기인 태백산맥과 넓적다리인 소백산백을 거느리고 있으니 더욱 든든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 사고(史庫)가 아닐까? <태백산사고지>가 그것인데, 임진왜란으로 국가의 중요한 기록이 불타 없어지고 전주사고만이 남게 되자, 조정이 묘향산, 오대산, 적상산, 태백산에 사고를 지어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게 했는데, 그 중 상태가 가장 양호한 실록이 『태백산사고본』이란다. 양백지간이 전국 최고의 피난지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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