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2, 전 영주문화원 이사)

1955년12월30일~1973년10월16일까지17년10개월간 영주역광장은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역 광장에는 인파가 넘쳤고 주변에 여관, 여인숙, 다방, 식당 등 유흥가 주변으로 바쁘게 영업이 이어졌다. 영주역전이 밤낮으로 이렇게 흥청거리게 된 원인은1955년12월30일 영암선(영주~철암)이 개통되면서 부터이다.

영암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강원도 탄전에서 생산된 무연탄수송은 모두 묵호항으로 수송하여 묵호항에서 선박에 싣고 부산, 마산, 여수, 목포, 군산, 인천 등지로 수송되어 다시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해 수요지까지 도착시켰다.

철암~묵호간은1940년에 이미 철도가 개설되어 있었다. 당시 무연탄은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중요한 에너지였으며 도시에서는 가정용 연료로 이미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연탄의 물류비용이 톤당2,328환이나 되었다고 한다. 1955년12월30일 영암선이 개통되고부터는 무연탄공급이 영암선을 거쳐서 전국 각지로 신속하게 공급되었다.

물류비용도 톤당260환으로 크게 떨어지고 각 도시에 공급된 무연탄은 지역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영암선 산업철도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 측량을 마치고 공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워낙 난공사 구간이 많아 보류 중이었다고 한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영암선 건설의 절실함을 느끼고1949년4월8일 위험을 무릅쓰고 영암선 철도 공사를 착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중단되었다가1953년9월28일 재 착공하여 숱한 우여곡절을 이겨내고1955년12월30일 역사적인 개통을 하게 되었다.

영암선 철도 공사는 난공사였지만 순수한 우리나라 기술진의 손으로 이룩한 자랑스러운 업적이었다. 부실한 장비와 토목공사 전문 인력 부족과 기량 인부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의욕과 투지로 험준한 태백산맥을 가로질러86.4km에 철길을 깔았다. 공사 기간 중 수 없이 일어난 크고 작은 사고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1955년12월30일 영암선 준공식이 봉화군 승부역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영암선 철길로 쉴 사이 없이 무연탄을 싣고 달리는 열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었다.

영암선이 바쁜 데는 무연탄 수송만은 아니었다. 강원도 탄전지대로 이사를 가서 벌어먹고 살기 위한 가난한 민초들도 줄을 이었다.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서울사람 할 것 없이 구름 같은 인파가 매일 영주역을 거쳐 강원도 탄전으로 일터를 찾아 들어갔다. 당시에 강원도 탄전으로 가는 길은 영주를 거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던 시절이다. 영암선이 개통된 이후 석탄 산업은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했고 그 중심에 영주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강원도 탄전 지역은 모두 영주상권 안에 있었다. 쌀, 잡곡, 밀가루, 된장, 고추장, 간장, 참기름 등 각종 먹는 것에서부터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주에서 공급하였다.

당시 교통수단이 철도 이외는 없었기 때문에 영주의 상권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강원도 탄전에서 생활하는 근로자들이 십여 만 명이 넘었으니 영주상인들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계속>

1955년12월30일~1973년10월16일까지17년10개월간 영주역광장은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역 광장에는 인파가 넘쳤고 주변에 여관, 여인숙, 다방, 식당 등 유흥가 주변으로 바쁘게 영업이 이어졌다. 영주역전이 밤낮으로 이렇게 흥청거리게 된 원인은1955년12월30일 영암선(영주~철암)이 개통되면서 부터이다.

영암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강원도 탄전에서 생산된 무연탄수송은 모두 묵호항으로 수송하여 묵호항에서 선박에 싣고 부산, 마산, 여수, 목포, 군산, 인천 등지로 수송되어 다시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해 수요지까지 도착시켰다.

철암~묵호간은1940년에 이미 철도가 개설되어 있었다. 당시 무연탄은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중요한 에너지였으며 도시에서는 가정용 연료로 이미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연탄의 물류비용이 톤당2,328환이나 되었다고 한다. 1955년12월30일 영암선이 개통되고부터는 무연탄공급이 영암선을 거쳐서 전국 각지로 신속하게 공급되었다.

물류비용도 톤당260환으로 크게 떨어지고 각 도시에 공급된 무연탄은 지역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영암선 산업철도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 측량을 마치고 공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워낙 난공사 구간이 많아 보류 중이었다고 한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영암선 건설의 절실함을 느끼고1949년4월8일 위험을 무릅쓰고 영암선 철도 공사를 착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중단되었다가1953년9월28일 재 착공하여 숱한 우여곡절을 이겨내고1955년12월30일 역사적인 개통을 하게 되었다.

영암선 철도 공사는 난공사였지만 순수한 우리나라 기술진의 손으로 이룩한 자랑스러운 업적이었다. 부실한 장비와 토목공사 전문 인력 부족과 기량 인부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의욕과 투지로 험준한 태백산맥을 가로질러86.4km에 철길을 깔았다. 공사 기간 중 수 없이 일어난 크고 작은 사고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1955년12월30일 영암선 준공식이 봉화군 승부역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영암선 철길로 쉴 사이 없이 무연탄을 싣고 달리는 열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었다.

영암선이 바쁜 데는 무연탄 수송만은 아니었다. 강원도 탄전지대로 이사를 가서 벌어먹고 살기 위한 가난한 민초들도 줄을 이었다.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서울사람 할 것 없이 구름 같은 인파가 매일 영주역을 거쳐 강원도 탄전으로 일터를 찾아 들어갔다. 당시에 강원도 탄전으로 가는 길은 영주를 거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던 시절이다. 영암선이 개통된 이후 석탄 산업은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했고 그 중심에 영주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강원도 탄전 지역은 모두 영주상권 안에 있었다. 쌀, 잡곡, 밀가루, 된장, 고추장, 간장, 참기름 등 각종 먹는 것에서부터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주에서 공급하였다.

당시 교통수단이 철도 이외는 없었기 때문에 영주의 상권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강원도 탄전에서 생활하는 근로자들이 십여 만 명이 넘었으니 영주상인들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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