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인생[20]부석면 남대리 임재월 할머니

8남매 중 맏이로 동생을 돌봤던 어린시절
민박업으로 어려움 극복...자식들은 자수성가


나는 81세이고, 이름은 임재월, 본관은 예천 임씨이다. 나의 고향은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을 지닌 치릉산이 있는 곳이다. 나는 8남매 중 맏이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 부모님 모두 농사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자연스레 동생들을 챙겨야 했으며 국민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 또한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만 듣고 동생들에게 암죽을 끓여 먹였고 집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농사일은 다 거들었다.

▲ 1950년 그날...
그렇게 10대 생활을 보내고 있던 난 갑작스레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민군은 총알도 없는 총을 들고 다니며 집안의 모든 음식과 옷가지들을 약탈해가기 시작했다. 밥을 안 해주었을 때는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했고 밥을 해주고도 나라에 신고를 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간주되어 죽임을 당했다. 전쟁을 겪은 후 평화롭던 우리 마을은 피와 죽음으로 뒤덮였다.

전쟁 후 3년 동안은 땅이 황폐화되어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온 산을 헤매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바로 도토리였다. 우리는 그것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만 영주 사람들은 그것도 없어 우리 지역으로와 도토리를 가져가기도 했다. 그렇게 생활이 궁핍할 때 먹었던 도토리와 곤드레 밥을 지금 아무리 건강식이라고 해도 그 옛날 힘든 기억 때문에 먹기가 싫다.

전쟁이 끝난 후의 생활도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다. 한번은 나물이라도 뜯기 위해 산에 올라갔는데 한참을 캐다 보니 땅에서 딱딱한 느낌이 나 들쳐보았다. 놀랍게도 사람의 해골이었으며 난 해골을 보자마자 놀라 넘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남대리 곳곳에는 전쟁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으며 전쟁 후에도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 혼인, 그리고 사랑 받는 비법
나는 가난했던 집안 형편 때문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때는 부모님께서 정해준 대로 가라고 하면 시집을 가야 했다. 그렇게 나는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남편의 이름은 이덕기, 나와 동갑이었으며 생일은 2월 초 이래날 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둘 다 어린나이에 아는 것 하나 없이 결혼을 한 것 같다. 남편에 대해 생각하면 내가 미안한 면이 많다. 남편은 지금까지 나의 잔소리에 대해 한 번도 반항한 적 없이 조용히 들어주었으며 나에게 큰 호통과 폭력 없이 잘해주었다. 하지만 손자들을 보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갔다. 예전 남자들은 아내를 소유물로 알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나의 남편은 그러지 않아 좋은 기억만 있다. 시아버지는 자상한 면도 있으셨지만 내 기억 속 이미지는 무서운 분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태도는 내가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서서히 바뀌셨다. 당시에는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첫째부터 여섯째까지 아들을 낳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시부모의 사랑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만 너무 많다 보니 이번에는 시어머니께서 딸을 낳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난 일곱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고 신기하게도 딸이 태어났다. 그 후로 시어머니는 또 딸을 원하셨고 기적처럼 딸이 태어났다. 모든 것이 시부모님의 뜻대로 되었다. 이러니 시아버지는 날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시아버지는 날 며느리로 인정해주셨고 전보다는 훨씬 편안한 시집살이를 할 수 있었다.

▲ 오지마을 남대리
남대리는 사방이 산과 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오지마을이라고 불린다. 이런 오지마을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매우 고됐다. 장을 보러갈 때에는 아이를 들쳐 매고 험한 산길을 갔어야만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고 젖을 먹여가며 걸었던 그 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남대리는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해져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나는 이런 남대리의 변화를 보고 민박을 시작했는데, 겨울에는 장사가 잘 안되지만 여름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찾아온다. 남대리의 자랑할 만한 것은 바로 아름답고도 깨끗한 자연이다. 험한 산속을 돌고 돌아 남대리로 들어오는 물은 그냥 떠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하며, 계곡을 둘러싼 산을 바라보면 절로 가슴이 뻥 뚫린다. 이렇게 그림 같은 자연 덕분에 여행과 치료를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주어 남대리가 더 활기차진 것 같다.

▲ 내 자식 만큼은
나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후회가 되어 내 자식만큼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비록 모두를 학교에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 자식들에게 고마운 점은 내 도움 없이도 모두 자수성가 했다는 것이다. 첫째 딸은 스스로 야간학교를 다녀 글을 익혔다. 또한 8남매 모두 내 속 하나 썩이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잘 챙겨주지도 못한 나에게 일본여행도 보내주는 자식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내가 삶을 잘 살아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바르게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좋은 것 하나 챙겨주지 못해 늘 미안하다.

▲ 해질녘 산머루에 서서
내가 살아온 인생을 글로 쓰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힘든 삶을 살아왔지만 인생을 살면서 느낀 점은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며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의 긍정적인 생각 때문에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긍정적인 생각이 현재의 삶까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사고하자!’ 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도움이 될 것이며 그 힘은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정리 _ 변수연 청소년 기자

(영주여고 1학년)
*영주여고 학생들이 2016년부터 3년째 우리고장 어르신들의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영주시립양로원 ‘만수촌’, 부석면 남대리, 영주시노인복지관 어르신들의 삶을 기록해 두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에 본지는 자서전의 내용을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다시 정리해 싣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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