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2,전 영주문화원 이사)

1457년(세조3. 丁丑年)정축지변(丁丑之變)이 실패로 돌아간 뒤 순흥의 밤하늘에 별빛이 사라졌다.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은 사사되고 순흥 백성은 도륙 당했다. 고을은 모두 불태워서 없애버렸고 순흥부는 혁파시켜 버렸다. 순흥부의 땅은 영천군과 풍기군, 봉화현으로 붙여버리니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순흥고을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얼씬할 수 없는 참담한 역적의 땅이 되고 말았다. 하루 만에 밀어닥친 천지개벽이다.

1542년(중종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숙수사지(宿水寺址)에 안향(安珦)선생 사묘(祠廟. 뒤에 紹修書院)를 세운 것이 부가 혁파되고 85년 뒤의 일이니 비로소 한 줄기 서광이 보였다.

1543년(중종38) 소수서원은 공궤(供饋)유생을 선발하여 1년 과정으로 교육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소수서원 입원록(入院錄)에 의하면 1년에 십 명 정도의 유생을 선발하였다.(경우에 따라서 加, 減이 있었음)

유생들의 출신지역별 분포를 보면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전국에서 선발되었으나 경상도 북부지역 안동, 영주, 봉화, 풍기지역에서 선발된 인원이 전체 유생의 절반정도 되었다. 유생들의 수준은 높아서 이미 사마시에 합격했거나 급제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소수서원에 입원(入院)하여 수학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급제뿐이 아니라, 학문의 길을 선택한 유생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 출신들이 영남유림의 근간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43년(중종38)부터 1696년(숙종22)까지 154년간 소수서원에 입원하여 수학한 인원은 734명이다.

1682년(숙종8) 드디어 순흥부가 복설되었다. 무려 226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영천군과 풍기, 봉화 등지로 분리 수용되었던 땅을 되찾았다. 이듬해(1683년)8월 21일 부사로 한성보(韓聖輔)가 부임을 했다.

순흥이 복설되고 37년이 지난 1719년(숙종45) 부사 이명희(李命熙)와 고을 선비 이기륭(李基隆)이 정축지변 때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원혼을 위하여 단(壇)을 쌓고 처음으로 제사를 올렸다. 너무나 늦었으며 초라하였다.

오늘의 금성단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23년의 세월을 더 보낸 1741년(영조17)이다. 이때 삼위(錦城大君位, 府使位, 義人位)의 단(壇)을 설치하고 토지, 제실, 제기 등을 하사받았다. 정축년(1457년) 참변을 당한지 285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단소(壇所.금성단)는 비바람과 개소리, 닭소리를 피할 수 없는 난장에 신위도 없이 단(壇)만 설치하였을 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원혼에 대한 예(禮)가 아니었다.

이는 필시, 영조(英祖)임금이 임시로 급히 단소를 설치하여 주었는데, 지금까지 사당한 칸을 마련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내려온 듯하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융통성 없는 일이었다.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이나 영월 장릉(莊陵) 배식단사(配食壇祠)의 규모와 시설을 살펴보면 알 것이다. 영주는 이런 면에서 너무나 인색(吝嗇)했다. 이런 일은 전적으로 영주인의 몫이며 마땅히 개선 발전시켜야 했음에도 무관심했음은 과오가 아닐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조선사 519년 동안 가장 비참했고 슬픈 참사 현장인 우리지역을 스스로 살펴 거두지 못하고 좌시한 것은 먼저 가신 선현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숙모전이나 배식단사와 같은 사당을 지어서 순흥하늘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을 모셔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할 것이다. 1895년(고종32) 순흥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주시(당시 영주군)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조: 조선왕조실록. 송지향선생의 순흥향토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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