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읍 동부리 임영회 씨

2016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전체 82.4년을 산다. 남자는 79.0년, 여자 85.5년이다. 1970년부터 매년 평균수명은 5.5개월씩 늘어나고 있다. 시대는 변화되고 점점 노년의 삶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지역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다양한 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건강이상과 회복으로 삶에 감사하며 기도
3년여 곳곳 청소하며 함께하는 의미 찾아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자”, “안녕. 얘들아”
지난해 9월부터 풍기중학교 학교지킴이로 활동하는 임영회(67. 풍기성내교회 장로)씨는 하루를 감사함으로 시작한다. 가난한 집의 맏아들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며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이 이어질 때쯤 찾아온 여러 번의 건강이상 증후가 그의 삶과 생각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둠이 남아 있는 이른 새벽 집을 나서 골목길을 걸어 새벽예배를 다녀오면 안전조끼를 착용하고 청소를 시작한다. 이렇게 거리를 청소하기 시작한 것이 3년여가 흘렀다. 지난 15일 그를 만나 이전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힘든 순간, 배움의 갈증 
그는 예천에서 태어나 4세 때 안정면 피끝마을로 이사를 왔다. 1965년 오계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 봉화군 춘양면 산골마을로 옮겼다. 굶는 날도 많았고 어려운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장작을 내다 팔았단다.
“장작을 한 짐 해서 6km 거리의 술집에 가져다주면 50원을 받았어요. 일주일 동안 300~400원을 벌었죠. 배고파하는 어린 동생들에게 쌀을 먹이고 싶었거든요. 당시 쌀 한 되에 300원 정도였어요”
일주일 벌어 쌀을 사서 밥을 하면 어머니는 쌀이 많다고 뿌듯해 했지만 그는 한 끼라도 하얀 쌀밥을 먹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단다. 그곳에서 3년쯤 살았을 때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그는 아버지에게 조금 더 넓은 곳으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16살 되던 해에 영주로 나왔다.
“모은 돈 중 50원을 들고 집을 떠났어요. 50원은 춘양까지 35리를 걸어간 후 영주까지 갈 수 있는 차비였죠. 걸어가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막상 영주에 도착했어도 일자리를 찾기는 어려웠죠”
힘이 들어 큰집이 있는 예천으로 간 그는 남의 집일을 했다. 그러다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영주로 와서 자동차정비공장에서 일을 배웠단다. 월급은 800원이었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먼 친척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어 풍기에 정착할 수 있었다.
“지금의 항공고 자리에 있던 풍기중이 일부 학년만 이전수업을 하게 되면서 수업 종을 치고 교사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1970년 4월이었어요. 풍기중학교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그러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은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위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춘양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풍기중학교 숙직실 한 칸을 빌려 생활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열심히 일해 1년 반 뒤에는 준공무원인 ‘소사’가 됐다. 몇 년 뒤인 26세에 결혼도 했다.
일을 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그에게는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있었다. 바로 배움이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빠듯했던 어려운 가정형편에 더 배우겠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 아쉬움이 결혼하고 자리가 잡히자 더 크게 다가왔다고 한다.
“배움에 대한 갈증은 내 동생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풍기에서 어려운 상황들로 배움의 때를 놓친 사람들에게 수업료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생겼어요. 바로 효광 안창근 선생님이 세운 새마음학교에서 배웠는데 제가 1기 졸업생입니다”
그는 안창근 선생에 대해 자신이 무학이고 불우했던 소년 가장으로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 배움에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셔서 배움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27살에 입학한 그는 학생들 중 최고령이었다. 25살인 그의 동생도 함께 입학했다. 동기들 중 나이도 많고 홀로 결혼해 회장을 맡았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 공부할 수 있는 기쁨에 모두가 열심이었단다.
“배움의 눈을 뜨게 해줘 정말 고마웠어요. 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청송교도소 교도관 시험에 합격했어요. 정말 기뻤어요. 안창근 선생님의 사모를 모임에서 뵙는데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세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남을 위해 살아라’라고 지금도 말하시죠”

▲기도의 힘, 감사한 일들
배움도 이어가고 생활도 점점 나아졌다. 그러나 그 행복에 걸림돌이 생겨났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40대 초반에는 피부병인 백선병에 걸렸다. 의학적으로도 고칠 수 없었고 손과 팔, 머리 등의 피부는 점점 하얀색으로 변해갔다. 자연스레 외부활동도, 사람들과의 만남도 줄어들었다.
“우울증, 대인기피증이 생겼어요. 병이 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약을 1주일에 한번 먹는데도 피부약이 독해 위장장애도 생겨났죠. 너무 힘이 들어 약을 먹지 않았어요. 몇 년 동안 거울도 보지 않았죠.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빠짐없이 하는 간절한 기도뿐이었어요”
그렇게 몇 해를 보내고 어느 날부터 더 이상 하얗게 번지는 것이 없어지면서 기적처럼 병이 나았다. 기쁨도 잠시 심근경색으로 식사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찾아왔다. 학교에서 숙직을 하는 3일 동안 같은 시간에 고통이 왔고 강도는 더 심해져 숨이 멈출 듯 아팠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겠구나 하는 순간,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떠올랐어요. 젊은 나이 홀로 6남매를 키운 안쓰러운 우리 어머니가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어요. 살려달라고...”
다행히 통증이 줄어들어 엉금엉금 기어가 옆에서 자고 있던 직원을 깨워 119에 연락해 살 수 있었다고.
“살고 보니 어머니 덕에 산 것 같아요. 어머니는 2년 6개월을 더 살다 돌아가셨는데 허전함에 매일 교회에 가서 어머니를 위해 울면서 기도를 드렸죠. 노년의 교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후 장로로 임명되는데 도움을 주셨어요. 부족한 제가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덕분인 것 같아요”
만 58세에 춘양초에서 퇴직하고 계약직으로 일했다. 그러나 2년 후 건강검진에서 위와 연결된 곳에 염증이 있었다. 발견이 어려운 부분인데 운이 좋았고 조직검사 후 암으로 판명되면서 수술해 살 수 있었다.
“3년 4개월이 지나 재발했어요. 의사가 수술이 어려운 부분이고 수술해도 가망이 없다고 했죠. 다른 병원에서 38일 동안 13가지 재검사를 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수술실 앞에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눈물이 났죠”
그는 수면상태에 꿈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좀 더 잘 살아갈 것을 후회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단다. 깨어나고 나서 너무 깨끗하게 수술이 잘됐다는 말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기 
암 투병으로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는 48년 동안 살아온 풍기에서 앞으로의 행복한 삶을 고민하게 됐다.
“다시 생명을 얻고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우리 집은 도로에서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들어와 있는 빌라에 9세대가 사는데 가장 오래 사는 사람으로 먼저 주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죠. 그렇게 함께 건물과 집 주변을 청결하게 바꿨어요”
골목길마다 버려진 쓰레기를 보고 흉을 봤다면 이제는 그가 먼저 쓰레기를 줍는다. 그랬더니 자신의 기분은 좋아지고 골목은 깨끗해졌다.
그의 하루는 오전 4시 마스크, 장갑을 착용하고 집을 나서 감사기도와 함께 새벽기도를 오가는 길목을 따라 자루와 집게를 들고 쓰레기를 주우며 청소를 한다. 그가 다니는 성내교회 맞은편부터 골목길을 따라 곳곳을 다닌다. 이런 일과는 수술 후 2년 9개월 동안 계속 됐다. 또 골목길 따라 30여세대가 사는 주민들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골목길에 놓인 음식물쓰레기통이 채워지면 일주일에 한두 차례 큰길로 이동해놓고 빈 통을 가져다 놓는다.
“수거차량이 수거하는데 길이 좁아 골목 안쪽까지 들어오지 못해 위생에도 문제가 있어 옮겨놓고 있어요. 채워진 것을 빈통으로 교환해 놓으면 5~6일 동안은 주민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모두에게 좋잖아요”
지난 15일까지 그가 주운 쓰레기는 1천400포대 가량 된다. 처음 이동이 많은 도로주변에서 하루에 8포대의 쓰레기를 주웠다. 지금은 하루에 1~2포대 줍고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지저분한 곳을 살핀다.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겐 상관이 없다. 쓰레기를 주운 곳에 땅이 나오면 이곳에 어떤 꽃이 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담배꽁초도 수백 개 주워요. 담배 사는 사람들은 많은 세금을 내는데 나는 담배를 피지 않아 세금을 덜 내니 내가 줍는다고 생각해요. 동네에서 줍는 쓰레기는 직접 쓰레기봉투를 구입하고 읍내에서 주울 때는 읍사무소에서 얻은 포대에 담고 있어요”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건강이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마음이 크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수술 후 바로 밖을 다녀 가족들이 말렸지만 그는 “내가 죽어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한다”고 말했다. 이후 자녀들이 또 다시 건강을 걱정할 때는 방치됐던 빌라가 변한 것과 골목길을 구경시켜줬다. 그날 큰딸은 아버지를 안아주며 존경한다고 말했다.
성내교회 장로인 그는 얼마 전부터 타 지역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간증을 다니고 있다. 마을을 청소하며 지난해부터는 풍기중 배움터지킴이로 아이들을 위해 즐겁고 청결한 학교를 만들려고 솔선수범한다.
“65년의 행복보다 지금이 더 감사하고 행복해요. 쓰레기도 줄어들고 좋지 않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고 어떤 사람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죠. 학생들도 내가 먼저 인사하니 함께 해요. 쓰레기도 아무 곳에 버리지 말고 나에게 달라고 하죠. 깨끗해지면 덜 버려요. 이런 일들이 참 감사한 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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