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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문화확대경[176] 들길에 나앉은 늙은이, 야옹정(野翁亭)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11.27 09:34
  • 호수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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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4대 사화(士禍)의 소용돌이에 몸서리친 조선의 선비들은 제각각 보신처를 찾아 전국의 산천을 나선다. 은둔과 자기수련으로써 도교(道敎)가 말하는 소위 신선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관직 대신에 선인의 길을 찾는 선비들의 행렬은 조선 후기 선비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명산대천을 무대로 구곡·팔경과 동천문화가 크게 발달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흐름은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491년 태어나 1554년 타계할 때까지 62년 동안 무오(1498), 갑자(1504), 기묘(1519), 을사(1545) 이렇게 4번의 사화(士禍)를 모조리 지켜봐야하는 운명의 야인(野人) 선비이었기 때문이다.
야옹 전응방의 그런 야인 기질은 그의 조부로부터 상속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은 문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에 이르지만, 수양대군이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김종서, 황인보 등을 제거하고 조카(단종)의 왕위를 찬탈함에 울분을 참지 못해 젊디젊은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고향 옥천에서 지내다가, 후일 차남을 데리고 영천(영주)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듭된 세조의 부름에도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출사하지 않다가, 더는 찾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처가가 있었던 깊은 산골 영주 휴천방 초곡으로 숨어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호가 휴계(休溪)이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될 때 호종(扈從,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던 일)한 뒤 바로 귀향하여 고향 칠성산에 단을 짓고 밤마다 북향 망배(望拜)를 했다 하며, 이후 단종의 피살 소식에는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손들에게 남긴 말은, 해마다 1년에 한 번씩 장릉(莊陵, 단종릉)에 참배할 것과 벼슬길에 나서지 말 것이었다고 한다. 야옹 전응방은 중종 때 진사(進士)에 급제했지만, 조부의 뜻에 따라 벼슬을 하지 않고, 오히려 조부가 피신했던 영주에서도 하룻길이나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정착했다. 그가 머루덤불을 헤치고 터를 마련한 이곳 영천군 귀내마을(현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에서 학문을 닦으며 평생을 들길의 야인으로 지냈다. 크고 작은 산이 마을을 겹겹이 에워싸고, 부쳐 먹을 땅이래야 몇 두락 되지 않는 한미한 산촌. 그래서 세속의 소란이 스며들기 어려운 곳, 그곳은 세속을 떠난 선인들의 은거지여서 한마음 오롯이 손수 기른 먹거리로 안빈낙도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호를 아예 야옹(野翁, 촌 늙은이)이라 하고, 조부 때부터 교분이 깊었던 퇴계 집안과 교우하며, 스스로 땅을 일궈 의식주를 해결했다. 그리고는 매년 세시(歲時) 때면 장릉을 찾아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능에 뿌리며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곧고 바른 반가(班家)의 법도는 야옹정(野翁亭)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500년 귀내마을을 지켜온 옥천 전씨 집성촌. 그 서쪽 끄트머리에 조용히 물러앉은 야옹정은 최근 건축한 종갓집과 함께 잘 보존되어 있다. 그는 퇴계의 권유에 따라 이곳에 야옹정을 짓고 퇴계와 벗이 되어 도학(道學)을 강론하였다. 그런 연유로 「野翁亭」이란 현판 글씨는 퇴계의 차지가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이곳을 방문한 퇴계는 야옹정에 올라 ‘야옹의 참 즐거움’(野翁眞樂)을 찬탄했다.
“청산은 집을 감싸고 물은 섬돌을 돌려 흐르는데/ …부인은 손님 위해 향기로운 술독을 열고/ 아희는 때 맞춰 싱싱한 채소를 뜯네/ 이제 알겠구나, 야옹의 참된 즐거움을….” 봄날의 야옹정 앞뜰은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서산에 해 떨어지고 동산에 달 떠 오르니, 달은 술잔에 어리고, 연못에 비치었다. 그래서 뜰은 봄을 감춘 마을이라 하여 장춘오(藏春塢), 연못은 달을 담아둔 곳이라 하여 저월당(貯月塘)이란 이름을 퇴계가 지어 주었다.
야옹정에서 건너다보이는 동쪽 계곡을 신선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석문동천(石門洞天)’이라고 석각하고 석문정사를 지어 강론의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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