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1950년 7월 23일 정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뒤 충북 영동읍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인근 임계리로 피난을 갔다. 임계리에는 마을 주민과 주곡리에서 온 피난민, 다른 지역에서 온 피난민이 500명에서 600명 가량 모였다. 25일 저녁, 피난민들은 미군의 유도에 따라 밤길을 걸었다. 영동읍 하기리에서 노숙을 하고 이튿날 국도를 따라 다시 걸었다. 26일 정오 무렵 4번 국도를 따라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미군이 시키는 대로 경부선 철로로 길을 바꾸어 걸었다.

철로 위를 걷는 사람들을 향해 갑자기 미군기의 폭격과 기총소사가 시작되고, 철로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급히 노근리 쌍굴다리 안으로 피신했다. 26일에서 29일까지 쌍굴다리에 피신한 피난민을 향해 미군이 기관총을 쏘았다. 300명의 피난민이 우리의 아군으로 알았던 미군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었다. 쌍굴다리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99년 9월 미국의 AP통신 마사 멘도자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동료인 최상훈 기자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멘도자 기자는 미 국방부 자료와 퇴역한 참전미군들을 취재하여 노근리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미 기병 1사단은 ‘미군의 방어선을 넘는 자는 적이므로 사살하라’고 명했고 미군은 노근리에서 200명~300명의 양민을 사살한 사실을 확인했다.

기자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바로 기사를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이는 명백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Massacre)이므로 한-미간의 외교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국인 미국에 대해 불리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이 옳을까도 생각했다. 이런 문제로 갈등을 하다가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이므로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밝혀져야 할 일이므로 보도를 결심한다. 멘도사 기자는 이 기사로 언론의 노벨상이라는 퓰리처상을 받게 된다.

이 보도를 계기로 한미합동 진상조사단이 꾸려지고 2001년 미국은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임을 인정한다. 클린턴 대통령도 유감을 표했다. 2004년 국회에서는 ‘노근리 사건 희생자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지금 노근리에는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평화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영주시협의회’에서는 ‘시민과 함께하는 통일기행’으로 노근리 평화공원을 견학했다.

노근리 사건을 이렇게 되돌아보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미군은 우리의 우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피난민을 향해 폭격을 하고 기관총을 쏘았다. 베트남에 파병된 우리 국군도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미군이나 한국군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전쟁은 이렇게 사람을 황폐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왜 노근리 사건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묻혀 있었는지에 대해, 전쟁은 왜 사람을 황폐하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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