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인생[19] 부석면 남대리 이옥순 할머니

탄광일 하던 아버지 따라 남대리로 이주
그곳에서 겪은 참혹한 전쟁, 그리고 고단한 삶

▲ 내 이야기 들려줄까?
나는 남대리 지킴이, 여든 한 살이나 먹은 할머니여. 눈 깜빡할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에는 주름 꽃도 활짝 폈네. 언제 이렇게 세월이 간 지 모르겠어. 나도 한때는 꽃다운 얼굴이었는데 말이야, 이런 늙은이 이야기 한 번 들어나 보고 갈라우?

나는 어려서부터 산으로 들로 나물도 캐러 다니고 땅따먹기도 하며 자연이 주는 놀이터에서 자랐지. 동생들도 생기고 부모님은 일하시느라 바쁘니 나는 젖을 다 뗐을 즘에는 집안의 식모 노릇을 하며 살았지. 그때 형편이라는 게 학교는커녕 밥만 먹고 살아도 다행인 시절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어느 날 이사를 가게 됐다며 짐을 챙기라고 하셨지. 아버지께서는 탄광 일을 그만두시고 물 좋은 터에 땅을 한마지기 사두었다고 이제 그 땅으로 넘어가자고 말씀을 하시더라고. 우리는 머리에 옷뭉텅이를 이고, 한손에 동생들을 꽉 쥐어 잡고는 펑펑 울며 친구들에게 인사했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너도 배곯지 말고 잘 살라고, 동무들 두 손을 천천히 놓으면서 아름다운 마을 풍경들을 두 눈에 박아 넣고 눈물을 머금으며 산을 넘어 이곳 남대리로 건너 왔단다.

남대리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파랗게 녹음이 우거져 새들이 나를 반겨주는 것만 같았단다. 나는 이곳에 빠르게 적응 해나갔단다. 예전 기억들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이곳환경에 적응하면서 원래 있었던 아이처럼 행복하게 지냈단다. 그렇게 계절이 네 번 바뀌고도 또 네 번이나 바뀔 동안 나는 농사일을 거드느라 까맣게 그을렸고, 벼이삭이 노랗게 익을 때는 나의 몸과 마음도 숙녀가 되어 갔지.

▲ 잊힐 수 없는 날들
나는 13살이 되던 그 해를 평생 잊을 수 가 없단다. 여느 때처럼 산에서 풀을 가득 머리에 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지. 근데 그날따라 못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우리 마을로 내려오는 거 있지. 옷은 마치 우리 일제 강점기 때 보던 옷 같이 노리끼리한 군복을 입고서는 총칼을 메고 우리 마을에 내려오는 거야. 인생 다 산 것 같은 표정으로 총칼을 휘두르며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필시 나라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지. 그 일이 바로 6.25 사변이었지.

그 날 이후로 아침만 되면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었어. 알고 봤더니 피난을 떠난 것이었지. 그래서 우리 가족도 인민군들을 피해 피난을 나왔지. 그런데 다음날 새벽 갑자기 천지가 울리는 소리가 났단다. 시꺼먼 헬리콥터들이 큰 소리를 내면서 우리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어. 우리들이 있었던 피난처는 아비규환이 되었지.

나는 겁에 질려서 동생들을 데리고 남대리 쪽으로 도망쳐 왔지. 우리 마을 쯤에 다다르자 빨갱이들과 군인들이 총격전을 하는데 우리한테도 총알들이 비 오듯 쏟아지고 마을은 헬리콥터가 포격을 하도 해대서인지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어. 나는 손발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는데 순간 아버지가 나를 낚아채서 너머 마을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갔어. 만일 그때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온 몸에 총알 자국이 박힌 채로 흔적도 없이 죽었겠지.

▲ 한 평생을 바쳐 사랑해 온 단 한 사람
내 나이 어느덧 16살, 혼기가 찬 나이가 되어 아버지가 짝지어준 사람과 혼인을 하게 되었어. 나는 건넛마을에 사는 나보다 여섯 살 정도 나이가 많은 건장한 남자를 만났지. 같은 남대리에 살면서도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혼인을 올리게 됐지. 신부답게 발그런 볼을 머금은 채 연지곤지를 찍고 부끄러운 얼굴로 혼례를 치렀지. 처음 보는 우리 영감님도 수줍은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지. 그렇게 우리는 같이 부부로서 백년가약을 맺고 살게 되었지.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진 않아서 우리 영감님은 우리 집에 얹혀서 살았어. 우리는 아이들 먹여 살릴 생각에 미친 듯이 땅을 일구고 밭을 매고 거두어 장에 나가서 팔고 품도 팔며 살았지. 이렇게 살다보니, 한 때는 너무 서러워서 그냥 다 포기 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 열심히 일해도 우리는 언제나 돈이 많아 본적은 없었어. 그래서 우리 자식들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고, 우리 자식들 교육 못 시킨 게 평생에 한이 됐네. 우리 영감님도 매일 그 일을 안타까워했지.

우리는 쉰이 넘어가고 흰머리가 될 때까지 한번도 떨어지지 않고 남대리를 지키면서 사랑하고 의지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지. 그렇게 행복했던 나날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고 내 팔순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영감님은 멀리 여행을 떠나셨지.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우리 다음에 만나면 마실이나 나가면서 못다 한 수다나 떠세.

▲ 남대리는 우리 모자의 넓은 지붕
나는 소백산 물줄기가 항상 흘러내리고 사시사철 푸른 나무가 있는 이곳 남대리에서 한 평생을 살아왔다. 아장아장 걸어와 나를 엄마라고 부르던, 우리 아기는 세월이 흘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기르고, 손주도 있는 어엿한 한 집안의 할아버지가 되었고, 지금도 남대리에서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지. 남대리는 우리 모자의 넓은 지붕이다. 가는 사람을 마중 보내고, 오는 사람을 환영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방식이다.

우리 모자는 남대리를 항상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아 갈 것이다. 좋은 날, 슬픈 날, 기쁜 날, 우울한 날, 우리는 그 모든 나날들을 함께 하면서 모든 추억들을 남대리에 묻을 것이다. 매일 아침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면서, 밭을 갈고, 고추를 따며 오순도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살아 갈 것이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한, 우리는 옛날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 그대로 서로를 기억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우리의 인생은 남대리와 함께 흘러갈 것이다.

정리 김수연, 나민영(영주여고 3학년) 청소년 기자

*영주여고 학생들이 2016년부터 3년째 우리고장 어르신들의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영주시립양로원 ‘만수촌’, 부석면 남대리, 영주시노인복지관 어르신들의 삶을 기록해 두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에 본지는 자서전의 내용을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다시 정리해 싣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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