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단양 성금이마을 입구에 있는 시묘막

고래로 <시묘살이>는 상례의 하나로 여겨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이 탈상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지내면서 묘를 돌보는 일을 말한다. 3년 탈상 제도는 자식이 태어나서 먹고, 입는 것을 혼자 할 수 없는 유아기 동안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최소한의 기간에 근거한다.

<시묘살이>는 효(孝)를 중시하던 유교사회에서 널리 이루어졌다. 자식은 산소를 돌보고, 부모님이 살아 계시던 때와 똑같이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공양’이라고 부르는 간단한 상차림도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부모님의 죽음이 자신의 불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3년 동안 수염과 머리카락도 깎지 않은 채 음식과 의복도 극도로 절제된 생활로 고초를 견뎌낸다. 이런 풍습은 당시의 예절이자, 자식으로서의 도리로 숭배되던 민속이었다. 조선조에는 <시묘살이>를 부모에 대한 가장 효성스러운 행위로 평가해 3년간 <시묘살이>를 마친 사람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리기도 했다 한다.

15년 전쯤인가? 서산시 성현면 일람리 야산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한 유범수라는 분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가 전부로 알려져 있으며, 생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시묘살이>를 하겠노라고 다짐했던 그는 하필이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때 다쳐 병원에 입원 중이었으므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더욱 큰 죄책감으로 느껴 퇴원하자마자 바로 <시묘살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시묘살이> 중에도 그는 깨알같이 공책에 적은 한자를 글을 모르는 어머니께 이야기하듯 읽어 드리기도 하고, 음식도 차려 누가 가져 왔으니 잘 잡수시라고 살아있는 부모에게 이야기하듯 <시묘살이>를 실행하였다 한다.

그는 현재 ‘(사)서천어버이대학’이라는 봉사단체 이사장으로 지역사회에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단다. 물론, 지역사회에서 효도 관련 인성 강사활동을 겸하면서.

구인사 가는 길,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산90-1 성금이마을에도 시세에 드물게 시묘막(侍墓幕)이 남아있다. 이 막을 지은 사람은 이 마을 사람 김기선이라는 사람으로, 지금은 그도 고인이 되었지만, 생전에 그의 어머니가 80세의 일기로 운명하자 묘지 옆에 눈비를 겨우 피할 움막을 짓고 1964년부터 3년간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성금이마을을 들어서는 협곡 길은 소형 찻길 하나 겨우 허락하는 고적하기 짝이 없는 한적한 도로이다. 입구를 조금 올라서면 성금이마을과 말금이마을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금이길로 들어서면 된다. 성금이, 말금이마을이 모두 아주 첩첩 산골이지만, 말금이가 오라버니처럼 산 밖으로 나앉은 격이라면, 성금이는 다소곳한 누이처럼 내실에 들어앉은 형국이다. 그 입구 중간쯤에 시묘막이 위치한다.

시묘막은 귀틀집처럼 나무를 쌓아 벽체를 만들고 틈 사이를 진흙으로 발랐으며, 바깥으로는 돌과 진흙을 덧대어 벽을 보강했다. 지붕은 나무울을 엮어 덮었고 그 위에 초가를 얹은 초가집 형태이다. 방 하나일 뿐 부엌도 마루도 딸리지 않았다. 움막의 쪽방은 사방 1.5×1.2m 반 평짜리 직사각형 모양이며, 움막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1m, 문 크기는 65×45cm로, 성인이 엎드려야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내부도 좁다. 천장이 낮으니 일어설 수는 본래 없고, 누워서도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이다.

“부모님을 여읜 죄인은 다리를 펴고 편하게 잘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이 건축물에 녹아든 것이라고나 할까. 깊이 잠들지 않고 산소를 돌보기 위해 일부러 작고 초라하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작은 방안에는 장난감 같은 시렁(선반) 하나 걸쳐져 있고 방을 데울 난방장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부모를 여읜 효자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가는 시묘막이 나그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는다. 단양군은 유일하게 남은 이 유적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 1997년 보호시설을 만들었단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이 3년 동안 심상(心喪, 마음으로 근신하는 일)을 지냈는데, 자공(子貢)은 무려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묘 곁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추모하였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풍습으로 보이는데, 고려 말에는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등 사대부들이 <시묘살이>를 하여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선비들은 관습적으로 <시묘살이>를 이행하였다. 역대 국왕들도 상중에는 여막을 짓고 생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전통적 풍습이다. 4차 산업혁명을 떠들어대는 지금에 와서, 우리는 낳고 키워준 부모에게 우리는 어떤 모습의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지? 「인성교육진흥법」의 ‘효(孝)’자 지우기 법안을 제출했다는 금배지 속에는 또 무슨 꿍꿍이가 들어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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